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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속사적 관점 영어 | 구속사적 관점으로 보는 성경66권 156 개의 정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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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속사적 관점 영어 | 구속사적 관점으로 보는 성경66권 156 개의 정답
구속사적 관점 영어 | 구속사적 관점으로 보는 성경66권 156 개의 정답

구속사적 성경해석 박종철교수(고신대) A. 정의와 관계된 문제점 성경 본문을 바르게 읽는 자라면 성경에서 구속사를 회피할 수 없다. 그것은 성경이 만들어진 자체 과정이 이 구속사 사상을 유지하려는 데서 이루어졌기 때 문이다. 이 구속사가 어떻게 정의되든 구속사는 우리가 단순히 믿는 대로 삼위 일체 하나님이 인간을 위해 하신 모든 신적 행동을 총체하는 개념으로 특히 예 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하나님께서 성도의 공동체 생활을 하는 자기 백성에 대한 자기 계획을 실현하는 역사적 사실들의 총체를 의미한다. 이중에서 특히 예수 그리스도의 나심, 수난, 죽으심, 부활, 승천이 핵심이 되 고 있다. 하나님께서 여러 선지, 여러 직분 등 계시 기관을 통해 성령으로 증거 하였으니 후대인들은 이 하나님의 계시와 사건들에 기초를 두고 믿음과 지식을 가지는 것이다. 이러한 역사적 사건들이 종말을 향한 직선적 시간속에 여려 모양 방법으로 다 양성을 갖고 나타난다. 구약의 약속인 신약에서 성초되어졌듯이 동일한 말씀이 미래의 약속과 구속이 또한 그대로 이루어질 것으로 믿는다. 이러한 구속사에는 통일성과 함게 다양성이 있다. 구속사에 대한 성경을 믿는 자는 반대할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오늘날 현대 교회를 어지럽게 하는 것은 성경 해석학의 문제다. 과거 한국 교회가 여러 분파로 갈라서게 된 이유 중 근본적인 것 하나가 바로 성경해석문제였다. 또 이와 관련해서 우리가 성경 해석학의 문제를 생각하면서 구원사적 성경 해석 문제를 거론한다는 것은 큰 의의가 있다. 우리 시대가 처해 있는 신학적 혼란기 역시 성경 해석학의 문제에서 비록된 것이다. 이런 때의 우리 교회가 지향하는 방향이 무엇이냐를 음미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다행히 최근들어 우리 교회는 “구속사적 성경 해석”에 대한 지대한 관심을 갖게 되었다. 과연 이것이 우리의 해석 원리가 될 수 있을 것인가? 그런데 오늘날 해석학계에 “구속사”라는 말이 혼돈을 야기시키고 있다. 그것은 개혁주의자들만 이 아니라, 자유주의 신학자들도 구속사라는 말을 대단히 즐겨쓰고 있기 때문이다. 교의 신학자 K.Barth,W.Pannennberg,신약학자 R. Bultmann, O. Cullmann은 물론 구약학자 von Rad등이 즐겨 쓰는가 하면 심지어 교회사 학문에서도 구원사 교회사의 시대 구분을 지우는 것이 무엇이며, 정경의 구원론이 현재까지도 계속 되지 않는가 하는 문제에서 심각히 토론되고 있는 주제이기도 하다. 신교학자 들 뿐만 아니라 로마 카도릭 학자들도(K.Rah-ner)등 구속사를 심각하게 다룬다. 그리고 오늘날 신구교를 막론하고 엄습하고 있는 현재 여기서의 경험을 계시로 강조하는 신학들도 나름대로 구속사를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이 말의 사용의 빈번도와 선호와는 반대로 학자마다 구속사의 일관성 있는 분명한 의미를 보여 주지 않은 데 있는 것이다. 지금으로부터 반세기 전에 G.Weth가 이미 “구원사는 오늘날 많이 논쟁되는 말이다….. 이 개념은 의미와 취급은 곧 우리 현대 신학의 일반적 동요와 분열의 거울상이 된다. (Die Heilsgeschihte lhruniverse-ller und individueller Sinn in der offenbarungsges chichtlichen Theologie des 19 Jahrhunderts,(Munchen,1931, P.2) 하였는데 이 말은 오늘날도 구대로 적용될 수 있다. 1959년에 와서는 이 말이 가져다 주는 불분명서이 더 이상 계속되지 않게 하기 위해서라도 신학 사 전에서 “구속사”란 말을 아예 제거해야 한다는 논문이 나왔는데 그것이 바로 K.G,Steck 가 쓴 “Die ldee der Heilsgeschichte”(in Theologische Studien, Heft 56 Rollikon, 1959)였다. Steck는 이 논문에서 J.C.H.K.V.Hofmann, A.Schlatter, O.Cullmann의 구원사 신학 개념을 개관하고서는 구원사의 말을 선호하려 하는 동기들에 대해 가치 있는 관찰을 하였던 것이다. “그런고로 구원사적 -요소들은 기독교 진리를 순전히 사변적으로, 순전히 인간론적 – 실존 철학적으로 전개하려는 시도들을 제지 하는 것을 도와 주어야만 한다….기독교 지식의 열쇠로서 구원사 사상은 종교 개혁과 정통주의 교리 사상을 혐오하는 데서 자라오고, 또한 개혁 추구와 함께 가장 현대화하는 방편으로 더욱 신비적 기독교 이해를 하는 것이다”(동상 P.12)라 한다. 그리고 스테크는 쿨만이 구원사라는 열쇠를 갖고 고대 교회를 보았던 것에 대해 그것은 그리스도의 승천과 재림간의 구원사적 긴장을 생략해 버리는 듯한 키엘켈가드적인 동시성”(Gleichzei-tigkeit)사상에 반대하여 또한 교회 시대를 아예 중간시대로 강조하는 로마 카톨릭주의에 반대하여 (Cullmann, Christus und die Zeit,1289) 계획된 것이라고 했다.(동상 P.43) 그래서 스테크 자신이 확정한 결론은 이렇다: 구원사상은 기독교 복음의 특징이며, 시대의 사 상을 바르게 되도록 기여할 수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소위 간현주의(Doketismus)로 근절시키기 어려운 경향은 구원사적 사고가 아니고는 물리칠 수 없기 때문이다.(동상 P.52) 스테크의 이러한 말들에서 구원사 개념의 양면성이 더욱 분명히 나타나게 되었다. 그의 견해에 따르면 역사주의가 구원사적 사고방식을 통해 신학에 진입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동상 P.53). 더욱이 구원사 사상은 우리에 대한 하나님 의 구원을 “과거”에만 집착해서 연유를 삼는 반면에 “현대”와 연관시키는 데 별 로 성공하지 못한다고 지적하였다.(동상P.54). 그리고 우리가 하나님의 계시를 찾고 기대하는 것은 성경 본문 속에 살아 있는 복음의 음성 (Viva vox Evangel ij)안에서이지 역사 안에서는 아니라는 것이다. 하나님의 처우하심이 성육과 부활 안에 수렴되어 있고, 그리고 이 처우하심이 “말씀”의 증거를 통해 우리와 접촉한다는 것이다. 그러니 “그것이 (하나님의 처우) 역사 한에 들어와서 믿음으로 만드는 것이 아니고 말씀 안에서 우리에게 증거되고 인봉되는 것”(동상P.61) 이라고 한다. 그리하여 스테크는 말하기를 “구원사 사상은 역사적인 최고의 인식 탐구로 인정 되어 기독교 진리를 역사 개념의 수단으로 이해하고 증거해야 한다. 그러나 사 실적으로 그렇게 증명되지 못하는 것은 사람들이 그것을 잘못 사용하기 때문이 라는 것이다” (동상 P.61) 이와 같이 그의 말은 오늘날 신학 토론에서 신랄히 예각되어 있는 문제 곧 구 원,혹은 진리, 혹은 말씀, 혹은 본문, 혹은 케리그마라고 하는 주제와 역사라 주제가 구원사 개념에 수렴되어 있다는 말이다. 다시 말하면 구원사 사상이 하 나의 신학적 개념으로 정착하여 그 같은 원리들을 천착하여져서 우리의 해석학 원리로 나타나기에 앞서 구원사 개념이 강조된다는 아리스토적인 스콜라주의, 상태적인 정통주의며, 또한 역사에 대해 무관심을 나타내는 실존주의적 “동시성”(gelijktijdigheid)에 반대하여 연유된 배경이 있다. 한마디로 말하면 구원 과 역사와의 관계이다. 이 둘이 서로 모순되는 것인가 아니면 서로 조화될 수 있는가 하는 문제인 것이다. 이것은 곧 진리를 이해함에 역사는 어떤 위치에 있는가 하는 것이다. 역사에 정당한 위치를 부여하지 않고 정경을 떠나서 역사 자체 안에서만 그 진리의 의미를 찾으려고 하면 구원사 개념에는 벌써 역사주의 가 개입하게 된다는 것이다. 구원사에 있어서 바로 이러한 역사의 문제가 오늘날 해석학의 주된 관심사가 되고 있는 것이다. 현대 신학의 실마리들이 얽혀 있다해도 과언이 아닌 이 구 원사 개념의 문제는 우리 스스로가 구원사적 전통을 견지하고 있다. 하여 무비 판적으로 성경자체에만 들어가서 구원사적 체계를 발전시킨다 해서 간단히 해 결될 문제가 아니다. 그러니 우리 입장에 일치하는 구원사적 원리들을 제시하기 앞서 구원 혹은 진리와 역사가 이해 되어져 왔는지를 살피는 것이 중요하다. 한마디로 말하면 “구속사”란 말 자체가 개혁주의적이라고는 할 수 없고 그렇게 소개된 적도 없다. 이 말 자채는 쉽게 여러 종류의 경험신학이며, 이성주의며, 실존주의며, 이단들에 연결되어 그 나름대로 사상체계를 세운다. 그러니 우리는 이런 것들을 구별해 낼 사명이 있는 것이다. 이런 작업을 1934년도에는 Nass S- childer 교수가 행하였다. 그 당시 바르트 신학이 개혁 교회에 스며들어올 때, Schilder 는 “역사의 본질과 가치에 대한 전혀 다른 개념이 변중 신학과 개혁주 의자들간에 신학의 오류를 미리 간파하고 교회에 알려 준 데는 스킬더 교수의 공로가 크다. 그리고 바르트의 역사 개념이 구약 해석학에 영향을 주었는데 이 영향 아래 쓰여진 것이 W.Vischer의 Das Christuszeugnis des Alten Testament 과 M.Hellbardt의 논문 Die Auslehung des Alten Testaments alstheologische Disziplin(ln Theologische Blatter 16, 1937 pp129-143)였다. 이들에 대해서 화란 개혁 구약 교수였던 N.Holwerda는 “설교에 있어서 구원사” (“De Heilshistorie in de prediking” Gere for meerd Theologisch Tijdschrift ,Aattea, novended 1942)에서 이들의 구원사 개념을 “가현적 해결”이라고 진단 했던 것이다. 그 이후 칼 바르트의 신학의 여러 분야에 영항을 미치자 그의 ” 교회 교의학”(kirchliche Dogmatik 1932)에 나타나는 “구원사”를 철저히 분석하 고 그것을 불트만의 실존적 의미의 구원사 개념과 비교하면서, 또한 칼 바르트 의 구원사 개념의 구약학자 폰라드의 전승사 개념에 미친 것을 보고 이를 서로 비교 분석한 학의 논문이 C.Trimp교수의 Om de Oeconomie vanhet Welbehagen( Goes: Oosterbaan s Le Cointre, 1961)였다. 그는 결론짓기를 바르트와 불트만에게는 본질적으로 같은 컨센서스(de eigenl- ijke Consensen)가 있다고 하였다(동상 p.191). 이쯤 되면서 개혁 신학자들에게 는 구속사의 진리 규명에 있어서 변증 신학과 실존주의 신학, 전승사적 구약 해 석을 비교하면서 그 역사 개념을 정체를 구분할 수 있는 눈이 생기게 된 것이다. 그런데 우리 한국 특히 고려 신학교를 중심해서 말하면 바르트 위기 신학이 한 국 교회에 소개되고 브룬너가 1949년 말에 한국 교회에 와서 강의하자 고신 학우회는 이 신정통주의 신학과는 상관이 없음을 밝히는 성명서를 내었고 그 이듬 해 1950년 3월에 진리 운동 제 일호로 박윤선 교장이 “정통 신학에서 본 바르트 와 브룬너의 위기신학”을 내놓았던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바르트 신학의 구원 사 개념의 역사를 의식하고 쓴것은 아니고 단지 교의학적 측면에서 바르트 교의 와 웨스터 민스터 신조를 대조한 정도였다. 그러나 근래에 바르트 연구에서 박 윤선 박사는 역사를 의식하나 그보다는 철학적 전제에서 바르트를 보고 있다( 신학 정론 1985). 요즘에 와서 윤리학 교수 이보민 교수는 “기독교 윤리학의 제 문제”(서울:기독 교 문서 선교회,1985)에서 해석학과 철학 문제를 다루면서 이 역사의 문제를 상 당히 깊이 있게 다룬다. 그러나 그는 현대 철학적 인식 구조 속의 역사 개념을 초월적 지평(transcendental cricitisism)에 의해 파악하려는 데 힘썼고 성경 분문 속의 역사 개념을 다루지 아니했다. 그러나 나는 “구속사적 성경 해석”( 서울:기독교문서 선교회, 1986)에서 성경 분문 속의 구원사의 역사 개념을 파악 하려 했던 것이다. 바로 이러한 문제가 오늘날의 해석학의 경계선과 과업이 무 엇이 되야 함을 시사해 준다고 하겠다. 그러므로 잠간 해석학의 본질이 무엇인지 규명하는 것이 우리 구원사 개념에 도움을 줄 것이다. 원래 해석학 하면 영어로 “hermeneutics”인데 이는 (snr 24: 27) 에서 온 것으로 “설명한다”,”주석해 내다”는 뜻이다. 이것은 단어 사전상으 로 볼 때 같은 의미를 가진 exegesis와 같이 직접적으로 본문에 관계되는 말이다. 그런데 오늘날 사람들은 “주석학”보다 “해석학”이란 말을 더 잘 사용하며 해석학이란 말이 어떤 권위가 있는 듯이 과대평가하는 경항이 있다. 해석학의 원래 의도는 “주석의 이론”이란 뜻으로 해석학은 본문 자체에서 끄집어내는 이 론이며 학문이다. 그러므로 이론 자체는 계속 본문에 의해 양육 받고 교정받아 서 그것에 대한 사실적 해석이 되어져야 함이 마땅한데, 오늘날의 해석학은 그 보다는 이론적 체계를 독자적으로 확립하려는 것이다. 즉 본문을 떠난 이론 수립인 것이다. 개혁주의 주석가 S.Greijdanus는 1946년 에 이미 Schriftheginselenter Schriftverklaring(Kampen)을 쓸 때 이런 것을 예견이나 한 듯이 이렇게 말하고 있다. “해석함에 있어서 주석 자체는 그 작업 방식을 고려해야 한다” 그리고는 해석학은 그 성격상 “성경이 그 말씀하신 대로 그 뜻에 따라 해석되고 설명되는 방식에 관해서 하나님이 성경 안에서 계시하시 는 것을 따라야 한다(동상 p.6,7)고 했다. 그런데 오늘날 해석학은 이 고전적 의미를 떠나서 전혀 다른 방도로 나가고 있는 것이다. 우리 개혁주의 해석학은 B.Warfield가 말했듯이 선험적(apriori)작접이 아니라 경험적(a posteriori)작업이다. 어떤 인간적 전제로 해석하는 것이 아니라 본문을 연구해 본 결과로 나 오는 작업이란 뜻이다. 우리 개혁 주의는 본문에서 나온 진리 혹은 케리그마하 면 그것은 역사와 연관된곳으로 보며 여기에 어떤 역사간에 대립점을 찾지 않는다. 그러나 오늘날 해석학은 이 진리(케리그마)와 역사가 상치되어 있는 것으로 보 면서 , 또한 긴밀히 연락되어 있는 듯이 생각한다. 그러면서도 이 양자가 서로 조화를 이룬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 혹은 가능하다하는 것이 오늘날의 해석학과 구원사 이해에 난점을 주는 점이다. 이런 면을 우리는 역사적으로 살펴보고자 한다. B. 구속사적 해석의 역사-케류그마와 역사와의 관계에서 1. 고대 교회 안디옥파와 알렉산드리아파의 해석의 차이들도 결국 역사와 진리 문제였다. 문자적 역사적 면을 강조한 것이 안디옥파라하면 후자는 역사를 의도 적으로 무시하고 역사적인 것은 우연적이고, 유동적이라서, 역사는 결정된 진리를 결코 포함할 수 없다는 것이다. 오직 영원한 실재성 같은 이상 세계가 성경 이야기 속에 반영된다 하였다. 그래도 이것은 본문 안에 머물면서 영원한 영의 의미를 찾는 수단과 방법을 모색하였던 것이다. 2. 중세기 해석학 역시 상태적인(동태적이 아닌)말씀 세계를 개진하려 했던 것이다. 사물의 본질적인 의미는 말씀안에 밀착되어 있고 말씀 안에서 연구되었다. 역사는 이미 주어진 화폭에서 더 발전시키는 정도에 지나지 않았다. 역사는 시간 속에 있는 하나님의 임재였으나 하나님을 알기 위해서는 신구약의 역사를 빠뜨릴 수 없었던 것이다. 그러니 근본적인 화폭은 전 포괄적인 말씀 세계 그것 이었다. 3. 종교 개혁 당시는 역사의 문제가 신랄히 도전받게 되었다. 중세기 성당의 격납고는 허물어지고 인간은 벌거벗은 채 하늘 아래 서서 다시 구원 문제를 서슴 없이 새로이 진술하는 시기였다. 현재의 구원을 묻는 형편에서 볼 때 종교 개혁 당시의 사람은 과거의 구원을 물었던 중세인보다 훨씬 강했던 것이다. 역사의 문제는 이 구원 문제보다 더 강인해서 자기가 맏는 바의 구원의 객관성을 구원 사역의 역사적 객관성과 성경 본문에로 더 강하게 지향하고 있었던 것이다. 4. 종교 개혁 이후의 oethodoxie 기독교는 종교 개혁의 진리와 유산을 보존하고 교정한다는 것이 불가피하게 해석학상의 치명타를 초래한 것이다. 진리의 객 관성을 필요로 한다는 것이 한편으로는 신앙 진리 내용의 항목들(logi)을 각도 에 따라 정확히 분류하고 공식화하는 대로 경주하고 또 다른 한편으로는 신앙 이러한 진리를 나타내기 위한 새로운 신임할 만한 격식 구조(kader)를 찾았던 것이다. 진리를 논함에 역사는 단지 “운송자”(dragster)였고 아직 계시의 원천은 아니었다. 그럼에도 이러한 그들의 사고 공격에 치명타를 가져왔던 것은 점점 자기 들 신학의 생기를 빨아먹는 색객이 하나 생겼다는 것이다. 즉 역사라는 습지속으로 빠져들어감으로 진리가 그 늪은 헤어나지 못하고 신임할 만한 기초를 상실 하는 지경으로 나간 것이다. 5. 동일한 17세기에 이러한 오스독스한 기독교의 객관적인 성경 해석에 반대하여 개인적 경건, 회심과 중생을 강조하는 주관적의적 경건주의가 나타났다. 이 들에게는 성경이 주관적의적 경험의 수집으로 보였던 것이다. 6. 합리주의(17세기)에서는 이성이 만물의 척도로 군림하여 더 좋은 것을 확립 한다고 할진대 역사가 어찌 더 좋은 것을 말할 수 있겠는가? 당시 추상적인 것 과 합리적 이성적 이념만을 추구하는 과정에서 불가피한 결론은 신앙 진리와 역사상(상)이 근본적으로 갈라서게 되는 것이었다. 합리주의는 일반적인 것을 , 객관적인 것을 실재, 본질적인 것으로 생각하고 이 일반적인 것을 특별한 역사 적인 옷에서 출발하고 도출해 내야 한다고 함으로 진리와 역사를 연결, 조화시 키려고 하였다. 그러나 큰 대가를 치루어야 했던 것은 성경이 부차적인 것이 되 어 존경스럽기는 하나 오리무중의 것이 되고 만 것이다. 7. 낭만주의 새대에 역사가 겨우 색깔 없는 일반적 진리를 색깔 있게 해주는 정도 이상의 것이 아니라고 하여 역사를 부당하게 취급하였다. 그리하여 역사적 전통과 권위를 중히 여기는 복고주의로(예컨대 중세기에서와 같이)나간 것이다. 8. 19세기에 계속 역사적 탐구의 기적을 만들어 보려 했으나, 문제가 작아지기는 커녕 오히려 커졌다. 이때에 사람들은 두 가지 사실을 발견했는데 하나는 그 결과 역사와 같은 학문의 가능성을 의심함과 동시에 역사는 진리를 끝없이 상대 화하는 대로 치닫고 있었다는 점이다. 이 결과 역사 안에서 진리를 찾으려는 일반적 흐름은 회의주의로 종착되고 말았다. 우리가 19세기를 더욱 자세히 살펴보아야 하는 것은 어떤 의미에서 19세기를 더욱 해석학적 문제들이 너무나 진지하여 20세기는 이에 대한 답변을 해주려는 시도인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그는 성경을 무미건조하게 이성적으로만 읽고 역사적 삶의 이해 없이 읽는 것 을 반대했다. 그는 “히브리서의 정신에 대해”(Vom Geist der hebraischen poe- sie) 그는 인간성의 원시 정초의 언어에서 인간성의 발로에서 신의 언어를 발견했다. 성경을 이해하는 길을 헤르더가 천화성(Congenialiteit)으로 본 것은 이해하는 문제보다 생을 포괄하는 감정 문제로 보았기 때문이다. 감정을 통한 직 접적 파악, 이것은 영혼의 삶을 통해 그 당시 일어난 것에 집착하게 된다는 것 인데 바로 이런 것이 결정적 의미를 파악케 하는 해석학적 원리들이라고 한다. 어떤 방식으로 어떤 관계로 역사가 오늘 우리에게 의미를 갖는가? 각 시대가 다른 시대와는 관련 없이도 그 자체 의미를 가지는 것은 아니다. 역사의 의미는 역사의 전체적 한계에 의해 정확한 모습을 가지다. 즉 역사는 성장하는 성육 과정이며, 내 존재도 여기 한 지체에 각 시대와 각 민족도 각각 여기에 공헌하고 있다. 그러므로 역사란 하나의 발전이며, 과거란 인간성이 자라는 시대들의 연 속이다. 구약은 인간성은 유년기요 지금 우리는 청년기에 있다는 것이다. 그러니 Herder는 이성으로 모든 것을 판단했던 계몽 시대와는 달리 오늘의 삶 이 참여함으로서 고대 문서와 나와의 교류로 넘어가야 한다고 하였다. 여기에 성경 해석에 과거에 볼 수 없었던 새로운 국면이 생긴 것인데 좋게 말해 서 역사적 탐구가 부상되면서 철학적 해석학적 근거가 되고 있다는 점이다. 즉 인간은 역사를 찾는다. (historein)하여 자연 역사적 존재가 된 것이다. 그러나 이 역사 안에서 진리를 찾는다고 할 대 그 진리란 절대적일 수가 없는 상대주의와 내재주의에 빠지게 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신학적으로 말해 역사 안에서 신적인 것과 인간적인 것이 구별되지 않는 가운데 이성 (ratio)과 법칙(history)간에 추가 오고가는 것이 19세기의 경향이다. 그런데 현대 해석학의 교조라고 할 수 있는 Schleiermacher에 와서는 역사 뿐만 아니라 법칙과 지식의 모든 영역에 신학의 가능성의 문호를 개방한 것이다. 그 기초를 그는 “인간의 신의식”으로 보았다., 이 과거(역사)을 오늘의 것으로 연결시키는 방법이 슈라이 막허의 divinatie 이라고 하는 심리학적 해석이다. 이 심리학적 요소를 극복하고 역사적 형식들을 강조하는 Dithey의 Ausdruck 곧 표현의 이론들은 현대 해석자가 과거 역사를 이해하고 연결시켜 보려는 것이었다. 이러한 세속주의적 성경 해석에 반대하면서도 이들의 영향을 벗어나지 못한 학 자로서 19세기 후반기의 J.T.Beck(1804-1878) 와 J.C.K Hofmann(1810-1879)을 말하지 않을 수 없다. 이들도 진공 상태에서 시작한 것이 아니다. 그들에게도 역사적 전임자들이 있었다. 종교 개혁 후의 연방 신학 (Foderoltheologie)을 주장한 Johannes Coc-cejus(1603-1669)는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역사를 계약 체결의 연속으로 이해했다. 레이든 신학자였던 그는 합리주의적 접근과 스콜라 주의적 방법에 반대하여 성경 방식대로 언약과 하나님 왕국 언어로 연구하였다. 그러므로 칵세우스는 성경의 역사적 성격에 대해 관심을 가짐으로 구원사적 의도를 가졌던 것이다. 그러나 그는 성경 주석을 함에 있어 조직화함으로써 여러 가지 탈선을 하게 되었는데 예컨대 스스로 시대 구분하여 구약 시대에는 실제적 죄 용서가 불가능 한 것으로 보았던 것이다. 이러한 시대 구분은 지상의 천년 왕국론 사상을 잉 태하게 되었는데 그것은 오늘날 미국의 세대주의 사상과 비교될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그에게는 영원한 하나님 구원이 역사화되었던 것이다. 또한 독일 경건주의학자였던 Jonann Albrecht Bengel이 있다. 그의 Gnomon은 유명한데 그 당시 경직된 교회가 새 생명의 길로 가는 하나는 성경 자체로 돌아 가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더욱 신빙성 있는 신약 본문을 만들어 내려고 하였던 것이다. 그의 해석 윈리 하나는 성경은 살아 있는 유기체인 고로 그 부분들이 문법적 만 해석될 뿐만 아니라 역사적으로 해석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자기 왕국 계시 직전에 이 말씀 다음 말씀, 이 단계 다음 단계를 샅샅이 살펴 각 시대에 주어진 하나님 계시가 우리 성도들의 것이 되도록 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니 연대가 성경 계시에 중요한 요소를 구성하고 있다. 어떤 주제 (예컨대 그의 Suntagma de Sanctitate Dei에서 “거룩”을 다룸) 를 다룰 때에도 세기를 통해 하나님이 자기 백성을 취급하는 성경 이야기에 따라 추구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벵겔의 본문 연구는 오늘날 우리가 사용하는 신약성경의 본문 비평에 많은 기여를 하였으며 그의 주제 연구는 Kittel의 신학 어휘 사전 등에 자극을 주었다. 또 그의 역사적 요소에 대한 의식은 Hofmann의 구원사 사상 뿐만 아니 라 오늘까지도 진행되는 예수 생애 탐구 (Leben Jesu Forschung)의 길을 터놓았던 것이다. 이러한 전임자들의 생각과 당시의 사상을 배격해서 베크는 우선 세속적 해석학에 반대하여 성경 영감 교리를 재건하려 했다. 그는 지나간 단계 들에서 신적 진리가 무엇보다도 성경 안에서 재현되었다고 보았다. 하지만 인간성 안에는 작용하므로 도덕적 성숙의 과정을 밟았다고 하므로 그는 진리와 역사 문제를 – 1750년 이후 슈라이 막허 이후부터 상당히 양자가 별거 되었었는데 – 다시 긴밀히 연관시키려고 하여 성경 역사와 인간 역사를 하나의 큰 과정으로 연결시켰다. 그러나 이것은 영원한 이성 – 진리의 개념으로나 슈라이 막허적인 하나님 의식 역사로 하는 것이 아니고, 역사 안에 작용하는 말씀에서 연결시키는 것이다. 그리하여 베크는 역사적 탐구 방법에 위치를 부여하려 하는데 몸에 관한 것은 언어와 역사 같은 외적인 것인데 이것은 필요하긴 하나 완전한 이해로는 이끌지 못한다는 것이다. “혼”은 심릭학에 관계되는 것인데 친근성에 관계되는 것 이라고 한다. “영”은 성경 해석의 깊은 것 곧 “심령적 해석”(pneumatische uitlegging)으로 앞 양자를 포함하는 핵심적인 것이라고 한다. 그리하여 “성경 자체의 영은 그 해석자이다”라고 함으로 역사적 비평의 위험 이 예기되는 것이며, 성경의 사건들을 역사와 연관시킨 것이다. 그러므로 베크는 일반 역사와 성경 역사가 하나님 왕국의 유기적 -역사적 발전 에 의해 서로 수용된다고 본 것이다. 이점에서는 Erlangen 학파의 대표였던 Hofmann(1810-1877)도 마찬가지 였는데 그는 역사 안에 구원사 (Histori)가 현존함을 보고 또한 구원사의 진전을 말한 다. 그래서 역사가 계시가 되고 계시가 역사가가 되는 것이다. 이런 생각에서는 역사란 그 자체가 계시 능력을 가지고 자율권이 있는 실체가 되는 것이다. 이와 같은 구원사적 사고방식은 신앙 진리와 이 진리를 운송해 준다는 관심에 서 차선책으로 나온 것이다. 그러나 이 사고 방식의 문제는 역사 안에 “성경의” 역사상을 넣어 읽음으로써 (inlezen) 여러 면에서 인간 역사로 채워지고 그에 따라 비평의 대상이 되며 또한 구원사가 어떤 유기적 발전 패턴으로 보아진다 는 점이다.(K.Fror, Biblische Hermeneutik Munchen, 1964 P.26). 9. 이제 우리는 19세기 말과 20세기를 걸쳐 살았던 세사람을 살펴 보고자 한 다. 그들은 금세기 해석학과 역사문제를 심각히 다루고 오늘날까지 크게 영향 을 미치는 자들로 (Wilhelm Dilthey (1833-1911), Errnst Troeltsch(1865- 1923).M Kahler (1835/1/6-1912/9/7) 이다. 앞의 둘은 역사 자체의 이성 (Historische rede)을 강조하고 성경 본문의 역사 를 아예 떠나서 “역사 자체 의식” 곧 정신 학문을 객관성으로 보고 탐구함으로가 서 이들로부터 해석학은 성경과는 무관한 별개의 해석학이 되기 시작하였다. 1) 슈라이막허 노선을 따르는 딜타이이로 말미암아 해석학은 보편적이고 철학 적이 되었고 현대 해석학이 여기서 나왔다 하겠다. 현대 해석학은 해석을 위 한 규칙이나 기교의 체제를 찾아내려는 것이 아니고 실존 인간에 대한 해석학인 것이다. 20세기에는 이런 해석학을 M.Heidegger 가 하였다. 틸타이가 활동하였던 시기는 두 가지 면, 곧 자연 과학과 역사학의 제제를 받던 시기다. 자연 과학의 사실들에 대한 지식이 범람하여 인생관과 세계관에 영향을 미쳤다. 이런 자연 과학적 실증주의적이며, 기계론적 관점이 성경 해석학 에 크게 영향을 미쳐, 기적이라든지, 외적인자의 신존재 같은 것은 상상 할 수 없었다. 이럴수록 정신학은 실증주의적 지식과의 독재하에 들어가게 되어 정신학을 포기하게 되는 지경까지 나아갔다. 설사 그 정신학의 객관성이 증명된다. 그 권위가 있다면 타학문에 의뢰하는 데서 생긴 것이다. 게다가 모든 영역에 역사적 지식이 증가하여 성경 해석에 영향을 미쳤다. 이에 따라 엄격한 방법을 사용한 여러 주석책들이 나왔다. 1830-1900년 사이 F.C.Bauer,H.Ewald,A.Kuenen,J.Welhausen,A.Juli-cher등에 이르기까지 새로운 사실들이 홍수같이 쏟아져 나오자 인간들의 신앙을 새로이 정 립해야 지경에 이르게 되었다. 틸타이는 바로 이러한 자연 과학과 역사 학문의 지식을 예리하게 의식한 사람 이었다. 그는 일방적 자연 과학 일색의 지식만을 반대하는 입장이며, 또한 역사는 그 자체 지식을 수립할 수 없어 스스로의 학문이 될 수 없다고 하는 것에 반대하였다. 그는 칸트가 순수 이성을 찾았듯이 역사 자체의 법칙(ratio)을 찾으려고 하였다. (성겅 본문을 떠나서!). 어떻게 역사적 경험이 우리의 학문이 될 수 있을까? 하여 역사 세계의 구조를 찾은 슈라이막허가 했듯이 “이해”다. 이 이해라는 것은 모든 것을 연결하는 인간 본성, 어디서나 작용하는 인간 삶 에 의해 가능하다. 역사의 모든 표현들이 인간의 자아 정신의 표현이다.동일성의 보편적 구조의 기본 근거라고 한다. 이렇게 인간 정신의 구조적 영관을 포괄하는 이 위대한 역사로 인해 역사 법칙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그래서 삶의 모든 표현이 중요하 지만 문학적 표현들이 더욱 그러하다. 하여 틸타이는 자서전에 큰 가치를 부여 한다. 역사란 본질적으로 인간성의 자서전이라서 사실과 서술 진리와 시기(Wahrhei t und Dichtung)가 함게 전진하고 있다. 틸타이로부터 해석학은 인간 자아 지식 을 개진하는 역사 철학이 된 것이다. 여기에 정신 학문의 지식이 가능케 된 것 이다. 그래서 역사의 영역에도 객관적 철학적 결론을 내릴 수 있게 된 것이다. 사실로 이것이 가능한지는 틸타이는 자신의 생시에는 유보하는 것 같다. (H.W.de knijff,Sleutel enslof Ckampen : J.H.kok,P.86 1985) 이제 성경 해석가의 신앙은 하나님이 역사 안에서 행동하셨는지 아니하셨는지 또한 그러한 행동이 일반적 진리성을 가지는 지의 정신 학문에 달려 있게 되었다. 2) 여기에 역사학의 법칙을 확정한 자가 트렐취이다. 트렐취는 슈라이막허 이 후 신앙과 법칙이 말씀과 역사가 서로 제갈길로 가기에 이들을 서로 연결시켜 보려는 노력을 해 보았다. 그에게 분명한 것은 우리는 현대인이라서 과거의 사 실들에 대한 지식을 방법은 고전적 교의학적 방법과는 판이하다는 것이다. 후자의 경우는 역사적 사실의 상관성에서 사실을 분리시켜 사실 위에 절대성으 로 군림케 한다는 것이다. 트랠취의 법칙이라고 할 수 있는 비판, 유비, 상관 관계(말하자면 상대성)는 사 실과 관련되어 있음을 부인할 때는 사실에 있어서 역사적이 되지 못한다는 것 이다. 구원 사실이 역사 다른 것과 비유되며 유추적이며, 상관성을 갖는 다는 것이다. 그렇지 않고 역사 안에 있는 어떤 것이 아니면 그것은 사실과 일어난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성경의 절대적 언표가 어불성설같을 수밖에 없는 것은 성경 안에는 우리의 역사가 기술되어 있고 구원의 역사에 연관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트렐취는 기독교의 절대성을 추구한다는 것은 비극적인 것이라고 하는 것이다. 이렇게 말씀과 역사가 명백하게 구분되고 어떤 인과율적 역사 법칙에 따라 인 생관이 지배될 때 기독교 신앙은 어떻게 되겠는가? 다음 단계는 이러한 내재주 의적 법칙을 벗어나기 위해서 “도덕적 이상””인격성의 소명” 예수의 신의식” 같은 윤리적 종교성으로 나아가게 되는가 하면 “철저한 종말론적 해석” (A.Schweitzer,M.Werier)에서 돌파구를 찾는 것이다. 3) 켈러는 Der Sogennatnte historische Jesus und der geschichtliche Christ us (1892)을 썼는데 그는 역사적 비평 탐구의 예수상은 “과학자들의 열망의 거 울이 되었다. 인간 두뇌와 손의 조작물이 된 것이다” 라고 하고 다른 곳에는 Es ist Zumeist der Hern eigner Geist, in dem Jesus sich spiegelt(E.Wolf) 가 편집한 동상책 Munchen,1936 P.30 이러한 역사 탐구의 결과에서 나올 수 없 는 신앙의 더 확고한 근거를 찾아 학문적 문제성과 불확실성이 없는, 켈러 자신 이 말하는 대로는 “폭풍에서 벗어난 안전지대” (Storm – vrije Zone)로 만든다는 것이 역사적 예수와 초자연적 그리스도를 구분하는 일이었다. 그리하여 역사적 예수는 역사적 학문의 탐구의 대상이 되는 것이고, 역사적 그리스도보다 더한 이가 신앙이 근거하는 그리스도다”고 한 것이다. 이 말은 다시 말하면 예수 그리스도의 역사성이 없이도 신자가 될 수 있지 않은가 하는 문제로 연결되었다. 그 결과 기독교 신앙 진리는 역사성이 없는 비역사적인 것 이 되었다. 이렇게 까지 나아가자 기독인으로서 책임의 한계를 느끼게 되어 다시 학문은 그 요청되는 객관성을 지녀야 한다는 결론에 이르게 되었다. Harnack이 말한 대로 “객관의 순수한 지식”에 머물 때에 우리가 신앙에 대해서 말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또 다시 신앙은 학무에 근거하는 것이 되고 만 것이다. 그러나 역사책이 복음의 진수를 나타낸다고 할 경우 문제는 더 어려워졌다. 그것은 신앙의 비평의 대상에서 벗어난다고 할 때 또 다시 전대에 문제된 학문 에 돌아간다는 어려움도 어려움이지만 막상 그러고 보니 성경의 내용이 탐구자와의 시대적 거리감이 생겨, 본질을 벗겨 보겠다고 하는 탐구자와의 시대적 거리감이 생겨, 본질을 벗겨 보겠다고 하는 탐구자의 기대마저 포기하는 지경으로 나가게 되었기 때문이다 (여기에 양식 비평이며 성경 신학이 발전함). 요컨대 신앙을 학문(역사)에 근거할 수 없다는 것이며, 신앙은 그 자체 현실이기에 학 문을 필요로 하지 않으므로 말씀들에 의해 영향도 손해도 입을 수 없다는 것이 다. 그러면 학문(역사)과 신앙은 어떻게 연결될 수 있으며, 같은 사건 같은 본 문일 때도 그 양자의 구분이 가능한가? 역시 학문의 진리가 있고 신앙의 진리가 있는가? 이러한 문제를 답해 주려고 하는 것이 20세기의 해석 학자들의 노력들이다. 칼바르트의 변증법적 해석학이 그러하고 불트만과 그의 학파들(Emst Fuchs 와 George Gadamer)의 해석학이 그러하다. 또 M.Heidegger와 Hans George Gadamer의 철학적 해석학이 그러하며 소위 구원자적 해석학을 한다는 쿨만(신약),폰라드(구약),판넨베르그의 신학의 시도들이 그러한 것이다. 10. 칼바르트는 그의 초기 시대에는 계시의 모든 것이 역사를 초월해 있다고 주 장하였다. Gadamer가 “해석학의 선언”(hermeneuitisch)이라고 칭한 로마서 주석 (1919) 서언에서 그는 이렇게 쓰고 있다. “나의 해석을 위한 모든 에너지는 역 사를 통해서 또한 넘어서 성경 정신 곧 영원한 정신을 쳐다보려는 노력에 소모 되어 왔다.(Karl Barth,The Epistle to the Romans (London:Oxford University press,1957 P.1) 둘째판에서는 “본문에 기재된 문제는 창조적 근육의 긴장이며 변증법적 방법을 냉혹하고도 탄력성 있게 적용하지 않고는 풀어질 수 없다”고 한다(동상P.8). 바르트에게 있어서 이 변증법적 방법이란 시간과 영원, 본질적으로 하늘에 계 신 하나님과 지상에 있는 인간과의 관계를 두고 부정과 긍정을 하는 긴장으로 이해된다.”그러한 하나님과 그러한 사람과의 관계, 그러한 사람과 그러한 하나님과의 관계가 나에게는 성경의 주제며 철학의 본질이다”(동상 P.17)라고 한다. 따라서 바르트가 말하는 문자 (litera)는 그리스도의 영의 위기하에 오는 다른 영들의 음성이다. 오직 이렇게 하므로써 말씀들 안에 있는 말씀을 드러낼 수 있다고 한다. 바르트의 이와 같은 입장은 종래의 자유주의 입장, 예컨대 Julicher와 Lietzm ann의 역사적 비평의 피상적이라고 비판하고 나온 자기 입장인 것이다. 그는 말하기를 “만약 역사적 비평주의와 축자적 성경 영감 교리 사이에서 하나 를 택하라고 하면 나는 주저없이 후자를 택하겠는데 그것은 후자가 더 넓게. 더 깊고, 더 중요한 정당성을 가졌기 때문이다”(동상P.1)라 하였다. 그런데 바르트 는 영감을 하나님이 전적 타자가 됨으로 오는 범주에서 야기되는 변증법적 긴장으로 이해하고 있다. 선지자, 사도, 복음 전도가 한 오류 있는 말씀 속에서 작 용하는 영원한 정신의 신속함에 내적으로는 응답하는 그러한 해석 방법이라고 한가. 그러니 바르트의 로마서 주석은 사도 바울의 것이라기 보다는 자기 바르 트적인 표현인 것이다. 바울적인 인간론을 다루는 것이 전혀 아니다. 바르트는 자신도 이와 같은 시도는 바울 서신에 대한(on) 주석은 될를지 몰라도 바울의 (with)주석은 아니라고 인정한다. 이러한 로마서 주석을 비롯한 초기 작품들이 나오자 불트만을 비롯한 루터란 학자들의 비판이 거세게 나왔다. 이에 바르트는 이들의 비평의 소리를 듣지 않을 수 없었으며, 여러 현대적 주석가들의 탐구 조명도 참고 이해야만 했다. 그리하여 그의 방대한 “교회 교회학” (Kirchliche Dogmatik I/1.1932,I/2.1938 II/1.1940,III/1.1945,III/2.1948,III/3.1950,III/4.1951,VI/2.1955,VI/3,1. Halfte 1959,VI/3,2. Halfte 1959)이 저술됨에 따라 그의 사상에 변화가 생겼 다는 것이다. 그의 언어 구사나 개념 형성이 초기보다는 훨씬 덜 철학적이 되 었다고 한다. “하나님 말씀”이 “예수 그리스도”라는 말로 대치되고 “변증학” (Dialetiek)이 “역사”(Geschichte) 로 바뀌었다고 한다. 특별히 “교회 교의학”후기에 가면 갈수록 “구속사”(Heilsgeschich-te)라는 말을 즐겨 사용하고 또한 이 말과 함께 “역사”(Geschichte)를 사용하여 자신의 신학을 진술하려고 하였다. 또한 불트만에 반대하여 그리스도의 부활의 사실성을 말하고 그의 종말론을 비판하면서 인간 부르심이 시간 사건 안의 일이라 고 강조하였다 (KD IV/3 1037). 그리고 그리스도의 재림을 “역사적 이면서 또한 시간적 사건”(Ges-chichtliches ens also Zeitliches Ereignis)이라고 하였다. 또한 그의 로마서 주석을 지배하고 있는 하나님 역사와 인간의 역사의 이원론은 후대 작품에 나타나는 전적 긍정과 전적 부정 (opus proprium 과 opus alienum의 변증법과는 관련성이 없다 고 한다. 바르트 연구가들이 대개 이런 논조를 펼 때 C.Trimp 교수는 앞에서 말한 학위 논문에서 과연 바르트의 구원사 개념이 정통주의 입장에 돌아섰는가를 문제를 연구했던 논문에서 우선 바르트가 의미하는 구속사란 하나님의 수직적이며, 주 주권적 행위들을 지칭하는 것이며, 은익된 것이 세상 안으로 새로이 파쇄되는 것, 곧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 계시를 총칭하고 있다고 하였다. 이 구속사 속에는 우리의 시간 개념인 과거, 현재,미래 등이 파쇄되어 인간의 특징적인 시간이 살아 계시는 하나님 시간으로 들어올리워진다(Opheften). 이러한 바르트의 말 속에는 여전히 그의 초기 저서들 속에 있는 인간의 시간과 하나님의 시간의 이원론이 지배하고 있다는 것이다. 바르트의 시학은 초기 변증법적 신학의 주제들을 포기하는 듯하면서 당황하였 던 시대 형편에 비추어 책임 신학이 되려고 하였다. 이러한 입장을 나타내는 저서는 1956년의 Die Menschlichkeit Gottes 이다. 초기 로마서 주석에는 하나님의 부정이 하나님 긍정이 은익이었던 것이, 여기서는 하나님의 긍정이 부정을 내포하고 있다함으로써 하나님 긍정적 면을 더 강조하는 듯하다. 그러나 바로 이러한 순수한 후퇴는 (eine echte Retrakation) 나중에 와서 퇴각하는 것이 결코 아니고 하나의 새로운 상황과 시도에서 앞에서 정당히 말한것을 지금에 와서 더 좋게 말하는 것이다.(동상 책 P22). 이렇게 초기에는 미미한 공리, 진술한 것이 최종에 와서 그 처음 것이 폭팔하 는 전개 방식을 취하는 것이 그의 변증 신학 내용의 특징이라고 Trimp는 말한다.(Trimp.Ibld.P.194). 이렇게 전에 포기되는 듯한 사상들이 더욱 적극성 있게 또한 공공연하게 증명하는데 대해 바르트 자신은 이것을 구속사의 “이중차원” Zwei ldimensionlitat)이라고 하고 또 이것은 기독교 사상의 기본 (Undaten des Christlichen Denkens)에 속한다고 변명한다.(KD.IV.2920). 이러한 사상 발전 과정에서 그의 “구속”관은 가면 갈수록 하나님의 인본주의 (humanisme Gods)방향에서 만인 구원론적 경험을 나타냈다. 즉 하나님의 심판 이 신인간의 관계에서부터 하나님의 절대적 긍정과 하나님의 시간적 부정의 양면성으로 이해된다는 것이다. 우리는 이점에 대하여 G.S.Hendry의 “The Dogmatic Form of Barth’s Theology ” (In Thelogy Today,Princeton NT.XVI 1956/7,308-309) 에서 인용하면: “바르트의 교의학 사상과 초기 저서들의 것과 가장 깊은 차이를 만드는 것을 그리스도의 유일론 (Christocentrism)인데 이것이 그 변증법이 변화된 특징을 결정지워 준다”. 변증 신학이 처음에 나타날 때에는 그 변증법은 키엘케가드적 인 것 즉 신적인 것과 인간적인 것, 영원한 것과 일시적인 것, 무한한 것과 유 한한 것과의 무한한 질적 차이를 말하였던 것으로 로마서 주석의 특징적인 말 들- 전적타자, 진공, 죽음의 선, 위에서부터 오는 직선들의 말 등은 이 기본 주제의 다양성이었다. 그러나 이렇게 되면 신적인 것과 인간적인 것의 “타자성”이란 것은 결국 이 양자간에 전혀 어떠한 관계도 성립될 수 없다는 것이다. 만약 직선이 원에 타촉하듯이 신인간에 타촉한다면 성육 같은 것을 생각할 수도 없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결국 유한한 것이 죄악이라는 결론 밖에는 나오지 않는다. 바르트의 “교의 학”의 그리스도 유일론적 입장은 이러한 모습을 결정적으로 뒤바꾸어 놓았다. 이것은 신적인 것과 인간적인 것과의 타자성을 철폐하지는 않으나 그 타자성 은 긍정도 되고 부정도 되는 성육한 그리스도 안의 실제적 연합의 관점에서 고찰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성육은 신적인 것과 인적인 것과의 본질적 상반성 을 배제하고는 죄 때문에 오는 그들간의 실제적 구분을 드러내 준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은혜는 죄인들의 모순을 극복하는 행위이며 하나님은 이것을 통해 죄인들을 자기와의 교제에로 인도한다. 변증법의 요소가 제거되지 않은 채 그 위치에서 상당한 변화를 가져온 것이다. 그것은 하나님과 세계와의 관계에 있는 변증법이 아니고 영원한 신적 말씀 안 에 긍정과 부정의 내면적 신적 변증법이다. 바르트는 키엘케가드적 변증법에서 다른 것 곧 헤겔적 변증법으로 넘어간다. 헤겔적 변증법이란 절대 정신의 자체 운동의 반을 넘어 합으로 가는데 타자성이 합으로 극복하는 것이다”. Van Til 박사도 같은 맥락으로 말한다. “바르트가 후기 작품에서 자신을 교정하였다.”(Corrected)고 여러 저자들이 지적하였다. 그의 기독교 원리가 그로 하여금 하나님은 역사 안에는 물론 역사 위에 임재해 있음을 보도록 하였다는 것이다. 그러나 바르트의 이와 같은 강조 의 변화가 하나님이 역사 안에 직접적으로 자신을 계시하였다는 생각인가? 이러한 강조는 하나님이 진실로 역사 안에 계시되었으며, 바로 이 계시 안에 하나님이 전적으로 은익되어 있지 않다는 원리인가? 그러한 주장은 증명할 만 한 아무런 증거도 인정되지 못한다고 하는 것이다. (The Triumph of Grace Vol I.1958,P. 97). 바르트에게는 지상의 역사는 오로지 반영 (refletor)으로만 작용한다. 그에게 구원사의 본질적 중요성은 성부 하나님과 성자 하나님 사이에 있는 연합적인 역사 (Geschichte)에 국한되어 있다. 하나님의 절대적 긍정은 하나님의 시간적 부정에 의해 필연적으로 동반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역사적인 사변적 사고에서 기독교적 구원 교리가 바르트에게 정당하게 이해 될 리는 없을 것이다. C. 구속사에 대한 우리의 이해 I. 말씀의 역사 현대 해석학이 복잡하게 얽혀 있는 주제를 우리는 살펴보았거니와 우리는 진리 와 역사가 서로 떼어놓을 수 있는 성격이 아니라. 서로 정당한 의미를 갖기 위 해서도 일치되어야만 한다고 보는 것이다. 역사와 관련없는 말씀을 생각할 수 없고 어떤 결정적 말씀 의미를 강조함이 없이 신구약 역사를 말할 수 없는 것이다 이중 어느 하나를 희생하고 어느 하나를 절대화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런데 변증법적 사고에서는 진리(곧 케리그마)를 찾는다. 하여 역사를 무시하였다. 바르트는 우리의 현실 역사가 아닌 초월 역사 차원을 생각하는가 하면 불트만은 역사가 아닌 실존적 내면성, 순간적 결단을 강조했다. 대개 변증법적 신학에서는 역사를 무시하는 것이다. 반면에 쿨만은 말하기를 하나님의 행동 자체는 역사 안에서 보다도 더 구체적으로 인간에서 나타나는 데가 없다. 역사는 언제나 그 깊은 본질에 따르면, 하나님과 인간과의 관계를 형성한다. 즉 역사(이 경우에는 예수 그리스도의)는 “하나님의 계시 행동들의 모든 (빠짐 없는) 표현이다. 모든 기독교 신학은 가장 깊은 본질에 따르면 성경적 역사이다. 여기에 “하나님은 일상적 의미의 시간 사건들의 일직선 상에서 자신을 계시하신다….여기에 시간과 역사를 떠난 채 하나님을 생각한 여지가 없다”(O.Cullmann,Christus und die Zeit,Die Urchrist liche Zeit und Geschichtouffasung.1962 P.38). 여기서 쿨만은 구원사가 세속사와 같다고 말하지는 않지만, 하나님의 행동들에 의해 때들 (Kairol)에 미치는 특별한 구속사적 순간들을 말하는 것인데, 시간선 에 있는 특별 선택된 점들에서만이 구원사 노선을 구성하려는 하는 것이다. 그 목적은 좋으나 그가 양식 사학적 결과들을 받아들이므로 이 구속사 노선에 간격을 주는 점과, 어찌보면 역사가 계시의 별칭 (de no emer)처럼 주장하는 것 같다는 점이 문제된다. 여기에 우리에게 어려움을 주는 사실은 케리그마를 강조하는 자들이나. 아니면 역사를 강조하는 자들이 이상하게도 서고 배타적인 입장에서 있다는 점이다. 이에 대해, 판넨베르그는 케리그마와 역사를 연결시켜- 지금까지 말한 역사적 상황에서 나왔음을 우리는 보았거니와-” 구속 사건과 역사”의 첫 시작에서 이렇게 말한다. “역사는 기독교 신학을 가장 포괄적으로 집약하는 수평선이다.” 한 눈에 다 들어오는 시야라는 말이다. 모든 신학적인 질문과 대답은 역사의 테두 리 안에서만 의미가 있다. 역사와 무관한 신하은 이미 무의미하다. 이 역사란 하나님과 인류가 공동으로 소유한 것이며, 또 인류를 통하여 신이 자기 모든 피조물과 공동으로 소유한 것이다. 그리고 그 역사는 미래를 향해서 가는 것인 데, 그 미래가 이 세상에는 아직도 가리워져 있으나, 예수 그리스도에게서는 이 미 명백해진 것이다. 이것이 기독교 신학이 전제다”라고 하고 있다. 이런 그의 포괄적인 사상을 입증키 위해 그는 폰 라드의 전승사를 도입하면서 본문 배후의 진리를 찾으려 했으나 거기에서 하나의 구속사도 얻어내지 못하고 단지 보편사를 것을 발견했다. 즉 본문 배후에 있는 것은 한 부분으로서, 사실과 본문이 함께 말하는 것이다. 그래서 해석학이라고 하는 것은 보편사적 관찰의 한 부분이다. 본문과 독자 사이에서 일어나는 빛은 위대한 태양 진로에 있는 조그마한 계기로서 인간사가 파악되는 곳이다. 여기에 Gadamer이 말하는 상호 작용이 관계성이 일어나는데, 이것도 역시 판넨베르그에게는 보편사의 한 부분 이라는 것이다. II. 계시사 (Historia Revelationis)의 구조와 특징 이제 우리의 입장을 밝힐 차례인 것 같다. 오늘날 해석학이나 문제점들을 우리 가 믿는 성경이나 계시사를 아예 포기하고 시작하는 말들이다. 이런 파격적인 해석 태도가 우리의 신앙을 잠식할수록 우리는 우리 신행의 표준인 말씀이 말하는 그 내용(구원사)과 그 계시 역사 구조를 알아 두어야 한다. 우리가 계시사를 연구해야 할 목적은, 현대적 해석학의 도전에 응수하기 위해서는 물론이지만, 우리 자신이 하나님이 자기 말씀 가운데서 자신을 계시하시는 지식을 알기 위해서다. 계시사를 알려고 할 때 벌써 구약과 신약으로 구분되어 있는 그 자체가 성경에는 역사적 구조가 있다는 것을 보여 준다. 구약 자체 의 성격과, 이 구약의 신약과 가지는 관계에서 연구되어야 한다. 이스라엘 백성이 이방 민족 가운데서 선택 받은 것, 율법 받음, 신정국으로서 확립, 예루살렘 성도와 가나안 땅 거주, 바벨론 포로로 인한 이스라엘 민족의 단 절, 그리스도 탄생 이전의 암흑기 등, 각 시대들이 해석학적 의미를 가진다. 이 모든 것을 같은 하나님이 계시하신 것으므로, 계시의 진리를 역사의 옷을 입고 있는 진리이다. 그리고 구약과 신약을 전체적으로 관련시켜 연구해야 한다. 이렇게 성경을 연구할 때 나타나는 사실은 성경에는 진리들이 연속적으로 계시되고 있다는 사실 이다. 즉 다음 것은 앞에 것에 연관되며, 이것이 또한 더 나아가서는 과정에서 구원 약속이 더욱 개진된다. 그러나 구약의 계시 개진은 어디까지나 예비적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시작 단계에서부터 실제로 성취되어 가는 것이다. 요컨대 하나님의 계시 진리를 유기적 성장을 나타내면서 그 역사적 형편을 보여줌으로서 그 진리의 신성함을 나누어 주며 하나님에 대한 지식을 보여 준다. (G.Vos 성경 신학 P.9) 2) 그런고로 사건들- 역사의 전진이 대단히 중요하다. 구약에 이 사건들과 불가 분리의 관계에 있는 주의 말씀들은 그의 한 말씀에 속한다. 구약의 사건들은 (오실) 그리스도 안에서 자신에 대해서 그리고 인간의 대해서 말하고, 어제와 오늘과 미래에 대해서 말씀하시는 하나님 말씀에 의해 만들어지고 지배당하고 인도되고 해석된다. 그리하여 하나님이 자신을 알리는 자아 계시의 점진성으로 인해 계시의 전진이 있는 것이다. 이런 계시사에서 우리는 하나님과, 그의 덕들에 관한 하나님의 계시를 논구하는 바인데, 이렇게 함으로써 인간 존재의 피조성과 타락성, 회개 와 여호와 경외에 대하여 알게 된다. 특별히 하나님 언약의 전지하는 계시 속에 는 역사적으로 여러 가지 독특한 시대들이 있음도 보게 된다. (창3:9:12:17: 출3:19:34: 등 후시대에는 렘31: 등). 3) 우리가 계시 전진을 말할 때에 여러 면에서 역사 진전에 따라 발전적 면을 보여 주는 것을 참고로 한다. 예컨대 언어 개념들의 발전을 살펴야 한다. 언약, 죄, 인애, 영 등 언어 의미를 탐구해야 한다. 오늘날 언어 개념 탐구의 기능성 과 방법론이 많이 제시되는 데 우리는 그 탐구가 어떤 특수한 신학적 전제와 연관됨이 없다고 할 찐대, 그 언어의 의미들이 변천을 보는 것이다. 이 점에 대하 여 James Barr의 The Samantic of Biblical Language (Oxford,1961)를 참고함이 좋다. 그리고 계시사 구분에 계시 수단들이 많이 참조된다. 하나님이 성령으로 말씀 하심, 꿈과 환상 ,상징적 취급,문학 형식의 기능 (시,산문)지혜 문학적 성격 등 이런 구분들은 계시사의 발전이나 전진이라 할 때 이 말은 헤겔 철학적 진화론 적 발전 개념과 다른 것임은 말할 필요도 없다. 4) 하나님의 말씀하심으로 생긴 사실들 – 구약의 세기들을 통해 그 사실들이 진전되어온 그 역사를 우리를 계시사 (Hisoria revelatonis)라고 하며 계시된 역 사 (Historia revelata)또는 성경역사 (Hisoria revelata) 또는 성경 역사 ( Hisoria biblica)라고 한다. 사실상 하나님은 직접적으로, 혹은 인간의 수단을 통하여 자신이 어떤 분이시며, 자기 본질이 무엇인진를 자기 백성에게 알게 한다. 뿐만 아니라 그의 능력과 진노와 심판을 과시한다. 그러나 이것은 자기 은 혜와 사랑을 나타내기 위해 자기 백성을 대항하여 시작하는 것이다. 이러한 계 시는 하나님과 자기 아들과 그리스도 영을 통해 성숙하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전진하는 구원사에 대해서 말살 수 있지만 전진하는 계시사에 대해 말해서는 안 되게 되었다. 우리 시대에 “전진하는 계시” 사상에 반대하여 규정할 필요가 생겼기 때문이다. 보통 말하기를 성경은 하나의 문서로서 이전 세대들이 하나님에 대해서 무엇을 경험하였는지를 확정해 주고 있고, 오늘날 우 리 역시 이웃과 더불어, 세계와 더불어 같은 경험 범주에 속하면서 소위 “깊은 경험”을 한다고 한다. 이것이 구체적으로 사회적 변혁, 정치적 혁명을 치른다고 한다. 소위 이 깊은 경험을 “계시 경험”이라고 한다. 이렇게 될 대에 우리는 계 시사란 말에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또한 우리는 하나님 왕국이 말과 행위 역사 속에 나타나는 분명한 통일성이 있 음을 천명하며, 그 통일성은 유기적 통일성을 의미한다. 그러나 이 “유기적”이 란 말이 마침 꽃봉우리가 활짝 피어나듯이 어떤 생의 법칙처럼 일어난다는 것은 아니다. 하나님의 구원 작용은 계획적이기는 하나 그렇다고 해서 기계적으로 척척 이루어지는 그런 것은 아니다. 하나님과 언약의 백성 사이에는 불가능을 가능케 하며, 초인적 구원 작용이 역 사하며 태양이 어두워지고, 땅이 갈라지고 바위가 깨어지고 무덤이 열리는 하나 님의 손이 있다. 우리가 구원사의 통일성을 말한다면 역사의 모든 계시들이 자기 구원 계획을 실행하시는, 같은 하나님에 의해 만들어진다는 사실이다. 더욱이 이 통일성을 예수 그리스도의 생과 죽음의 과정속에 수렴시켜 놓았다는 점이다. 다윗의 보좌, 성부의 오른편에 있는(엡1:10, 20) 그리스도 안에 구원 사의 통일이 있다. 또한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명을 위임받았다.(행2:33-36). 이 성령을 통해서 이 세상의 길 따라 역사하고, 인간의 시대를 통해 그의 영광스러운 출연의 날, 구원 사가 완성될 때까지 역사한다. 그런고로 구원사의 통일성은 종말론적 사건이다. 수없이 많은 어떤 때는 종잡을 수 없는 사건들이지만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규제 되는 역사의 목적 지점에로 지향하고 있다. 그러므로 구원사의 통일성은 우리 인간의 이해나 컴퓨터 계산에 의해 기록될 성격이 아니라, 오로지 구원사의 조명은 삼위일체 하나님의 고백 안에서 찾아진다. 이런 의미에서 사도적 신앙 고백은 구원사의 파노라마를 어김없이 펼쳐 놓고 있는 것이다. 계시사가 하나님이 자기 백성 또는 원수에게 자기 자신을 알게 하려는 것이라 면, 이 하나님이 자신을 계시하시는 면을 인간과의 관계 방도에서 자기 구원을 보내시는 사실을 강조할 때 이것을 “언약사”라고 한다. 여기에는 신앙과 불신앙, 사랑과 사랑의 배신, 희망과 절망의 역사를 보게 되며, 시험, 의심, 유혹, 감사치 않음,좁은 소견, 우매, 자기 지혜, 하나님 계명에 반대하는 죄악들이 나타난다. 그러나 이것만이 전부가 아니라 이 비참한 장애들 을 극복하는 길을 보여 준다. 하나님이 모든 우여 곡절, 인간 사회의 굴곡의 불 신앙에서도 자기 백성을 그 목적대로유지, 지향하고 있음을 보게 된다. 우리가 구원사를 언약사로 볼 때에 언약을 강조함으로 구원사 속에 있는 인간을 간과하지는 않는다. 구원사에 인간을 간과할 때에는 구원을 객관화시켜 버리 는 결과가 된다. 인간 역사의 구체적인 것에서 벗어나서 하나님이 찬양을 받으 시는 분은 아니다. 구속사에서 우리는 많은 사실들을 말하게 된다. 사실 없는 역사가 없다. 그러므로 우리는 사실들을 추상적 개념으로 만들어서는 안된다. 사실 그 자체 소위 순수 사실을 존재하지 않는다. 사실이 하나님으로부터 유리된 채 존재하지 않는 다. 하나님은 사실에 안에서 행동하며, 사실을 설정한다. 또한 사실을 인간으로 부터 유리시킬 수 없다. 인간과의 교섭에서 하나님의 행동을 말한다. 구속사에 는 인간존재의 복잡성에 하나님 자신이 개입하셔서 끝없는 인간의 이성 작용에 맞서서 그것이 어떠한 형태의 우상 숭배, 형상 숭배나 주의가 되 못하도록 하여 주의 봉사에 헌신하도록 한다. 하나님 자신이 주의 백성의 하나님이라 일컬음 받기를 부끄러워 하지 않고 (히11:16) 높고 높으신 분, 영원히 좌정하신 분, 그 이름이 거룩하다. 하는 자 가 인간계에 내려 오셔서 자기 백성과 함께 거주하신다.(히11:16). 그리고 의 인을 위해서 한성을 예비하시는 분이다. 이렇게 하나님과 인간과의 관계에 대한 이야기 만큼 구원사를 근원적으로 설명해 주는 것도 없다. III. 유형론과 구속사 이 성경 계시사에 대한 연구는 19세기 말엽에 이미 화란에서 H.Bavink나A.Kuyper에의해시대적으로 생소한 시기에 상당한 관심이 표명되었다. 이들의 계시사에 대한 연구는 (1)성경 안에 언급된 사실들의 역사성을 부인하는 성경 비평에 반대하기 위해서와 (2) 전래해 오던교의학이 성경이 마치 “해설집” (bewijsplaastsen magazijn)같이 기계론적 – 자동적인 것으로 취급하는데 반대해서이고 (3) 성경이 종교적 개인 경건의 문서이며, 그것으로서만 단지 권위를 가진 것으로 보는 윤리적 성경관에 반대해서이다. 요컨대 개혁주의자들이 바르게 본 것은 “계시사”를 다룸으로서만 자유주의에 반대하는 소박한 근본주의적 항거에 대해서도 방어할 수 있다는 점이었다. 이런 면에서 위의 두 개혁자 외에도 성경 주석가들이나 설교가들었던 J.Von Andel, G.Doekes, J.C.Sikkel, T.Hoekstr들도 있었다.(F.W.Gresheide, Heilshist orische exegese in GTT 46(1946) 69 보라). 그런데 1930년 이후부터 구약 계시의 성경에 대한 새로운 인식이 생김과 동시 에 구약 계시에 대한 새로운 조명이 나타났다. 여기서 우리는 유형론(Typology) 과 관련시켜 살펴보겠다. 가) 구약 본문을 정직하게 관찰하는 자라면 구약 이야기는 미래 지향적인 충동 (voorwaartse drang)을 갖고 있음을 감지하게 된다. 하나님은 언제나 자기 백성 이 자기 약속을 신회하도록 권유하고 있으며, 약속들은 성취되기를 요청하고 있 으며, 백성들은 미래에 대해서는 많은 것을 기대한다. 이러한 하나님의 인도하시는 성향으로 인하여 이스라엘 백성은 역사적인 것 이외에 달리 그 무엇을 생각할 수도 없게 된다. 과거는 하나님에 대해서 말씀하고 있으며 미래는 그에 대해서 말할 것이다. 나) 하나님 약속들의 성취는 어떤 “차원들”(dimensies) 이라고 하는 “심층화” (verdiepingen)를 보여 준다. 쉽게 말하면 성취되었다고 생각하면 아지고 성취 되지 않은 그런 면이다. 이스라엘 민족은 광야를 여행할 때, 역사의 수평 안에서 시대 따라 계속 진행 하면서, 미래를 지향하는 긴장 가운데서 살았다. 역사를 따라 성취가 이루어지면 그 성취는 다시 새로운 대망의 근거가 되는 것이다. 하나님의 약속의 핵심은 언제나 예언이다. “나는 너희 하나님이 될 것이고 너는 나에게 한 백성이 될 것이다. 그래서 나는 너로 세상의 복이 되게 하겠다”고 하는 족장들에게 한 이 약속은 완전히 성취되지 않은 채 가나안 진입으로 깊어진다. 아직도 미불금이 남이 있듯이 한 부분의 성취가 남아 있다. 히4:9이 “남아 있다.”고 함으로써 “안식”의 약속에 계속되는 층계 가 있다. 일곱째 날 숨, 가나안 진입, 그 다음 시 95편에서 다윗은 신약 교회를 가르치고 있으며, 우리에게도 아직도 먼 훗날 다른 안식이 남아 있다. 이와 같은 식으로 “씨”와 “땅”에 대해서 우리는 살펴볼 수 있다. 하나님이 역사 안에서, 역사를 통해서 말씀하신다고 해서 하나님의 백성이 한 시대에 매여 하나의 정한 사건에 정지되는 것이 아니라, 앞으로 계속 지향한다. 지금의 교회 안에서도 계속 그런 형편이다. 많은 것이 그리스도 안에서 성취되었지만 아직도 미래 완성을 향한 충동이 남아 있다. 마침 망원경의 초점이 맞추어지듯 하면 더 엷고 깊은 조망이 앞에 있는 것이다. 카이퍼는 이것을 구약 역사의 “조망적 통일성이며 깊음”(“cioramarische eenh eid en diepte”) 이라고 했다.(Encycolopaedie der heilige godgeleerdheid, Ansterdam 1984,III P.P 104-105). 다) 이와 관련해서 우리는 “유형론”에 대해서 생각해야 한다. 유형론이 무엇이 며, 그 원리가 어떠한가에 대해서는 D.L. Baker 의 Two Testments,one Bible, (Intervasity press, 1976 P.P 239-270)에서 잘 밝히고 있다. 그는 유형론의 의미가 아닌 것은 주석도, 예언도, 풍유도, 상징도, 체계도, 아니라고 한다.(258-260). 그리고 유형론이 하나님의 계획이라든지, 특별한 한계를 가진다든지, 그리스도와 구속에만 관련한다든지 유형에서 반대형(antiype)으로 나아가는 미래적이며, 전진적인 전조형(prefiguration)이라는 생각들도 아니라고 한다. 그렇다고 해서 유형론이 환상적인 해석이나 로마 카토릭적 “더 풍성한 의미” (fullermeaning)를 뜻하는 것도 아니라고 한다. 그럼 무엇이냐 할 때 무엇보다 유형론은 역사적이라는 것이다. 풍유(allegory) 가 수직적인면에서 생각하여 위에만 순수한 존재가 있고 밑에는 단지 순수한 존재의 그림자만 있다고 하는 것이라면, 유형론은 이와 반대로 역사를 절대적으로 신중히 고려한다. 유형론적 사고는 구체적 사상 위에 있는 역사의 수평적 노선 에 따라 움직인다. 하나님이 이 세상의 역사 안에 특히 자기 택한 백성의 역사 속에 부지런히 역사함을 확신한다. 따라서 이 역사의 흐름 안에 있는 사건들은 일관성 있는 패턴을 따르므로 해서 한 사건이 다른 또는 많은 다른 것의 유형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둘째로는, 유형론에 전대와 후대에 오는 기관들, 인물들, 사건들 사이에 유비 와 (analogy) 실제적 상응점 (a real correspondence)이 있다는 점이다. 물론 상세한 점에 까지 병행점이 있다는 것이 아니라 근본적인 원리들과 구조적 일치점에 가지 병행점이 있다는 것이 아니라 근본적 원리들과 구조적 일치점이 있다 는 것이다. 구약학자 폰 라드는 이러한 유비가 구약 안에서는 역사의 시작과 종말 서술에 서 발견된다고 했다고, 이사야 11장은 낙원이 어떻게 회복될 것인지를 이상적 미래상으로 서술한다. 아모스 9:1은 미래 왕인 다윗 왕이 일어날 것을 보여 준다. 바벨론에서의 귀환이 애굽과 가나안 사이에 이스라엘 여정에서부터 나오는 말들과 상으로 서술되고 있다.(사52:11,12). 새 예루살렘은 고대 예루살렘의 행진을 나타내며, 출애굽은 바벨론에서부터의 구속의 모델이 되고 있다.(렘16:14,15:23:7,8: 호2:14). 그리고 여호와의 새로 운, 아직도 알려지지 않은 구속 사업이 이와 같은 유형론적 방식에 따라 고대 에 알려진 전형으로 서술되고 있다. 이럴 경우 고대 사건들은 새로운 미래 사건의 “유형”(Type)또는 모델 또는 형태(foom)라고 할 수 있다. 유형론에 전대와 후대간의 상응점 또는 유비가 있다고 해서 역사의 과정이 하나의 원과 비유된다는 의미는 아니다. 원상에 있는 사실이 다시 되돌아와서 모 든 것이 새롭게 일어나는 순환적 사고는 아니다. 이런 사상은 이교적인 것이다. 유형론은 다시 돌이킬 수 없는 전진 가운데서 나온다. 전대의 사건들과 후대의 사건들 사이에는 현세적 (taemporele)관계가 있으나, 후대의 것이 전대 사건의 정확한 복사판은 아니다. 그러니 유비는 똑같다 (identification)는 뜻이 아니며, 첫째와 둘째 사이에 점진성이 있으며, 규칙적으로 강세형 (steigerung)을 나타내고 있다. 고대의 것 이 미래에 재 언급됨과 동시에 능가하고 있다. 이런 의미로 구약은 신약에 대해 (튜포스) 또는 전조형 (praefiguratie)인 것이다. 하나님과 인간의 활동들이 일어나는 사건들의 복합성들이 유형적이라고 할 때 우리는 그 처음 것에서 보다 더 큰 복합성을 보는 것이다. 이런 규칙은 구약을 읽고 이해하는 데 대단히 중 요한 의미를 가진다. 유형론적 관계가 구약 자체 안에 있다고 할 때에(예컨대 출애굽-바벨론에서 의 귀환). 구약 전체의 이 관계는 그리스도의 사역과 새 언약의 관점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것이다. 개혁주의 성경관을 가진자는 이와 같은 관점을 출발점을 삼고 있지만, 성경의 통일성을 믿지 않는 자는 성경에 대한 이러한 견해를 갖기 가 쉽지 않다. 단지 신약 성경 저자가 고대 이야기들을 사용해서 이 이야기를 자신들에게 맞게 해석하였다고 하는 것이다. 그러나 성경의 통일성과 성경 저자 의 단일성을 믿는 자는 다르게 말한다. 즉 역사의 창조자며, 성경 저자이신 하 나님이 전대의 언어를 갖고 사건들 쓰되 새 언약의 “마지막 날”을 보고 썼다는 것이다. 신약 해석자는 고대 이야기에 어떤 가치를 덧붙이는 것이 아니고, 있는 가치를 자세히 설명해 내는 것이다. 이스라엘 백성을 인도하고 움직이고 형성하고 끌어내리고 다시 올리시는 것은 하나님 말씀이다. 하나님 말씀이 이스라엘 역사를 형성하는 힘이다. 하나님이 자기 일을 이스라엘 안에서 행사하시고 그 백성을 미래로 인도하고 있다. 이것이야말로 구원사의 추진력이요, 능력인 것이다. 이 역사 형성력의 하나님 말씀은 그리스도 안에서 완성된다.(요1 14:히1:12). 그리스도 안에서 자신을 계시하신 그 같은 하나님이 구약 백성의 역사 속에서도 그 씨를 심어 두었기에 구약의 사실들 속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지향하는 역사적 다이나믹한 힘을 보게 된다. 한 하나님의 계획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전대와 후대의 사업간에는 구조적인 유추가 있다. 구약에는 단편적이고, 예비적인 것이 신약에서 장성한다. 약속된 것이 성취되는 것이다. 약혼된 것이 결혼으로 이르는 것처럼 그림자 현상이 사실 화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구약 이야기를 해석함에 있어서 본문이 나온 전후 환경이나 시대에 비추어서만 해석하는 것으로 만족하지 않는다. 우리는 그 본문을 미래 지향적(nearvoren toe)으로 설명해야 한다. 이것이 성경 자체의 성격이다. 6) 신약에서도 1930년대에 이 유형론 문제를 다루었는데 특히 1939년에 Goppelt 가 알랑겐 대학에서 학위 논문 “Typos:Die typologische Deutung des Alten Te staments in Neuen” 썼는데 이 책이 많은 영향을 미쳤다. 그리하여 1939년에는 “바울에 있는 묵시주의와 유형론”을 첨부시켜 재판된 것이 1982년에는 D.M.Mad ving에 의해 영역되었다. 곱펠트의 생각은 대략 다음과 같다. 가) 곱펠트는 “튜포스”란 말을 기구 또는 결과로서 형식을 지칭한다고 한다. 이 “형식”이란 말은 스타일, 모델, 인상, 본, 흔적, 모범을 뜻한다. 신약에는 모범의 뜻으로 롬6:17:빌3:17:5, 살전1:7, 살후3:9, 딤전4 12, 딛 2:7, 벧전 5:3에서 사용되었다. 나) 이 튜포스는 한 사건이 후대 사건의 모형 (een beeld-von-raf)이 된다는 뜻 에서 사용된다. 곱펠트는 고전 10장 (6절과 11절)의 예를 든다. 바울 사도는 현 재의 형편에서부터 전대의 것을 본다. 고린도 교회가 당면한 먹고 마시는 것에 관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교회 과거에서부터 정보를 얻는다. 광야 고대사건 들을 들어 설명했으므로 독자들은 고대 이야기를 발견해 내는 데 별로 어려움이 없다. 그리스도가 그때에도 역시 있었고 세례와 성찬도 본질적으로 있었다는 것이다. 반석이며 홍해 건넜던 일이며, 만나가 그러하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구약 사건들과 현재 교회의 형편은 서로 유비(analogie)관계에 있다는 것이다. 물론 외적 환경의 일치가 있다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행위에서와 하나님의 시야에 있어서 본질적으로 같다는 것이다. 다) 동시에 사도 바울은 과거와 현재간에 차이가 있다고 하나. 11절에 “말세를 만난 우리의 경계로 기록하였으나” 하나님이 오래 전에 계획하셨던 바가 실현된 것이 지금 이 시대다. 그러니 우리의 책임이 더 크다고 한다. 라) 결론적으로 말해서 전대의 사건들에서부터 하나님은 성경 세대의 후대 결정 적 사역의 윤곽을 발견할 수 있는 구조를 보여 준다는 것이다.”튜포스”란 말이 사용되지 않는 곳에서도 그런 모형적 의미를 가진다. 이삭과 이스라엘 출생과 사라와 하갈의 압력 (롬9:7-9,갈4:21-31), 야곱과 에서의 출생 (롬9:10:13),모 세와 바로와의 조우 (롬9:17,18) 같은 것이며, 사도 바울이 3차 선교 여행에서 발견한 실제적 형편은 고대이야기에서 그 결정적 정보를 발견한 것이다. 이점에서 갈3:8의 사도 바울의 말은 더욱 강하다. 하나님은 언제나 이방인이 믿음으로 의롭게 되도록 하는 계획을 세워 두셨으므로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복음을 전파하여 가라사대 “모든 열국이 너로 인해 복을 얻를 것이리여”고 한 것이다. 여기 더 강하게 나타나는 것은 성경이 미리 보고 아브라함에게 말했다. 함으로써 성경과 하나님이 바로 동일시되고 있다. 하나님이 성경 안에서 상관하 여 거기서 말씀함으로 거기서 우리는 하나님을 만난다. 역사의 통일성과 성경의 통일성이 하나님의 계획 안에 있는 것이다. 이런 사상이 바로 유형론의 근본적인 기초가 된다. 마) 곱펠트가 하나 더 지적하는 것은 신앙의 유형론적 말씀은 선지자적 종말론 에서 나타난다는 것이다. 여기서 언제나 구원 시대가 전대의 구원을 갱신해서 능가하고 있다는 점이다.(사43:3-18,19 44:65 45:10-21) 라든지 “성전보다도 더 큰 이가 여기 있다”(마12:6)고 하는 것이다. 7) 지금까지 말한 것을 볼 때 유형론이 성경 연구에 있어서 그 정당한 위치를 차 지하고 있다. 지난날 성경 연구에서 보면 다음과 같은 것들이 그 대표적인 예들 이었다. – 떠오른 도끼(왕하6:6)는 십자가 형틀을 나타낸다. – 모세의 들어올린 손은 (출17:115)십자가 상에서 그리스도와 양팔 벌린 손을 뜻한다. – 아론이 호르산에 오른 것은 (민20:22) 골고다에 죽으려 올라가신 그리스도의 그림자이다. – 다윗이 예루살렘에서 기드온으로 도피한 것은 (삼하16:23) 겟세마네로 가신 그리스도를 나타낸다. – 여리고에서의 라합의 붉은 줄은 (수2:18) 그리스도의 구원하는 피를 상징한다. 이로 보건대 유형은 전기적 면에서 상세하거나 외적 환경이 우연적으로 일치한 데서 찾아지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사역하시고 인간이 역할을 하는 사실들과 사건들의 총체적 복합성에서 찾아지고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구약이야기에서 삼위일체 하나님이 그 사역하시는 분은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하나님이시다. 이런 내용에서 모든 구약 사건들이 서 있는 것이다. 그리고 성경이 우리에게 이 사실들을 서술하는 방식으로 이야기해 주시는 분은 성령이시다. 그런고로 이 모든 이야기들이 예수 그리스도와 신약 교회에 소망적으로 관련되고 있다. 전대의 사건은 “유형적 야웨”(Eypysch Jahwe)라고 하는 하나님의 사역 들을 계시한다. 그는 자신을 부인하지 않으시며, 자신을 반복하시지도 않으신다. 오직 마지막 날에 자신의 전대의 일을 능가시키시며, 그는 아들과 성령으로 말미암아 자기 간섭을 강세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유형론적 해석이 예수 그리스도에게로 수렵되어가는 하나님의 사역이라는 의미에서 구속사적 의미를 가지 되 일상 생활의 세부 사실들에게 같은 모형을 찾는다는 것과는 다른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지나친 유형론은 삼가야 한다. 이 모든 것에서 볼 수 있듯이 하나님은 변함없는 신뢰 가운데서 자기 백성을 찾고 있는 것이다. 구속사적 설교는 하나님의 사역에 대한 이 넓은 문맥에 대한 존경을 기초하고 있다. 구속사적으로 설교하는 자는 자신의 본문 해석 자체가 그리스도와 성경으로 지향하고 있으므로 고대의 하나님 일과 경륜이 기초가 되 고 완성되어가는 것임을 알게 된다. 8) 구약에 있는 이스라엘의 기나긴 역사는 해석학을 수행해 왔다. 영적 지도자 들, 역사 기술자들, 선지자들 제사장들, 오늘날 신학들이라고 할 수 있는 그 들이 “해석학”을 수행하였다. 고대 이스라엘이나 초기 기독교 교회의 활동으로 신구약 성경이 기원되었고, 어떤 면에서는 우리가 “계시사”라고 하는 많은 부분 이 이 해석학 활동의 결과라고 보아진다. 앞에서 계시되고 기록된 것은 후대에 설명하는 것이다. 이렇게 해석함으로 말미암아 계시사가 발전 성장해 온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우리가 믿는 바는 폰 라드 학파에서 말하는 전승사 개념과는 다른 것이다. 궁켈에서 확립된 양식학파 에서 한걸음 더 나아가 그 원천들의 배후를 더듬어서 그 양식이 어떻게 전래되 며 고대 이스라엘의 이웃(Umwelt)의 친근한 전승들을 살피는 것을 전승사라고 하는데 Martin Noth 와 G,von Rad가 있고 이 방법의 결과로 나온 주석이나 시편 책들이 그렇다). 폰 라드는 이 전승사 개념들이 더욱 발전되어 서로 채워지고 변천하는 역사 가 운데서 이스라엘 신앙과 결탁하게 되었다고 한다. 그 가장 오래된 신앙고백의 핵심은 신26:5-9 인데 이 전승 내용이 이스라엘 안에서 항상 새롭게 신앙, 케리 그마와 신학의 대상이 되었다는 것이다. 사람들은 오래 전부터 전래해 오는 것 을 “엿듣고”(luistern) 이것을 형편에 마추어 새롭게 재해석, 재현실화하였다는 것이다. 이렇게 됨으로써 전승들이 눈덩이리처럼 커가는 것이다. 제이 바티칸 문서에 나타나는 로마 카톨릭의 “전통”(trulition)도 이렇게 커간다고 함은 그 들이 이 전승사를 용납함이다. 그러니 우리의 계시사적 입장의 성경 해석학은 계시사가 해석함으로 인해 성장되어 온 것은 인정하지만, 이로 인하여 정경의 한계를 퇴조시키거나 말소시키는 일은 없다는 것이다. 9) 구속사와 교회사의 관계 문제 정경에 알려진 바의 구속 역사(historiasalutis)와 교회사와의 관계는 어떠한 가? 연구 분야의 한계를 설정하는 문제이지만 사실 구속 역사와 교회사간의 정체 구분을 획선을 그어서 정해 놓은 것은 없다. 그렇다면 교회사의 사건들이 구원사의 사실과 같은 평면 위에 설 수 없을까? 하는 문제가 오늘날 교회에 상당 한 문제를 야기시키는 진원이 되고 있는 것 같다. 그러나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신약은 어떤 교회사를 기술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교회사의 기초를 정초하고 있다 하겠다. 십자가의 죽으심과 사심에 초점을 둔 구원사 사실이 이방 백성들의 영역과 가슴에 파고들고 있다. 죄인들을 위한 우주적 복음인 동시에 죄인들은 하나님 왕국에 상관이 없다고 하는 양면성을 다 하나의 역사적 구조적에서 고려할 대 의미가 풍성해진다. 바울 역시 유대, 헬라 로마 배경을 단절, 혹은 섭최하면서 복음 진리를 나타내는 것이지 율법과 복음 이라는 변증법적 추상적 진리를 나타내는 것은 아니다. 그렇다면 교회사의 사도 이 사실을 수용하지 않는가? 이점에 J.Kamphuis 교수 의견을 들어 보면 다음과 같다. 가) 구속 사건들의 위치들은 다른 교회사의 사건들과 마찬가지로 같은 평면 위 에 있다. 말씀이 육신이 되었기 때문이다.(요1:14). 구원 사건들이 오늘날 우리가 알고 있는 역사들 즉, 우리의 옥중 성도들이 기 도한 뜻에서 고신 대학이 세워졌다든지,혹은 니케아 회의가 일어났던 세계와 같은 역사 속에서, 그것이 일어나지 않았다면 그 구원 사건들은 오늘날 우리와 아무런 실제적 관계가 없다.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획득된 구원은 그의 성령으로 말미암아, 교회사를 통해 전수되고 있으며, 오늘날 교회사 역시 하나님 구원 역사속에 속한다. 나) 그처럼 역사의 통일성을 인정한다고 해서 역사 내의 구분을 고려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역사서의 통일성(oneness)은 성경 신학과 교회론이 다 같은 신학에 속한다는 것이 될 것이며, 한 역사 내에서 구분한다면 신학 내의 분과별 제도의 구분을 가능케 하며 필요하게 한다. 다) 역사의 통일성 안에 확실한 구별이 있다. 성경에서는 하나님의 뜻과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이루어진 구원에 대해 권위 있는 계시가 주어졌으므로 닫혀진 정 경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반면에 교회사의 어느 시기도 이런 계시적 성격을 띤 것은 없다. 비록 믿는 자에게 주께서 그의 섭리와 은혜의 역사에게 계시하시 기는 해도 언제나 이런 것은 이미 성경에 계시된 것에 의해 결정된다. 라) 하나님의 계시가 신빙성 있는 계시이며, 이 계시에 의해 사람은 위임된 사 명을 수행한다. 교회사는 하나의 분야로서 이 원천에서부터 비평을 받는다. 마) 교회사 연구와 기술은 원천적 비평을 받을 뿐만 아니라 미래 모든 역사에 대해 비평,판단할 목적이 있다. 교회사의 모든 사건은 성경 정경의 권위아래 있다. 이는 교회가 교회되게 하는 하나님의 말씀의 상대화를 허용치 않는다는 것이다. 신앙 고백적인 교회사 서술은 계시된 성경 교리와 교회가 받아진 것과 일치되어야 한다. 이 정경적 귄위는 어떤 역사의 형편에서도 변할 수 있다. 이 정경적 권위는 어떠한 역사의 형편에서도 변할 수 있다. 그러나 교회사의 어 떤 것이든 절대화하는 것-교황 제도, 성경과 전통을 동일 선상에 두는 것 등은 역사 비평에 의해 제거 되어야만 한다. 콘스탄틴 대제가 동로마로 갈 때 서로마를 로마 감독(교황)에게 희사하였다는 콘스탄틴 희사는 이태리 인문주의자 Lore nzo Valla의 본문 비평에 의해 위조로 판명되었다. 이런 뜻에서 보면 “기술된 것은 일어난 것이다”라는 논리는 재고할 필요가 있다. 예컨대 과거에 진리의 소리를 발하다가 로마 카톨릭의 종교 재판의 단두대 에서 이단으로 사라져간 많은 dissents들, 그들의 기록은 불태워지고 남은 것이 라고는 그들을 처형한 원수(?)들의 입장에서 기술된 몇몇 정죄 귀절들만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보다 더 넓은 역사적 안목에서 조명해야 할 것이다. 이런 역사 비판에서 우리는 개혁주의적 역사관을 확립해야 한다. 바)성경은 그리스도 안에서의 하나님의 일과 이 세상에서 그 일의 역사에 대해 서 권위 있게 말씀한다. 이 하나님의 일을 교회사 기술의 출발점으로 인정하는 이 자체가 이 세상 역사 진전에 동일한 하나님이 적용하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다. 그런데 교회사의 관심은 이 하나님의 말씀을 위해서 혹은 거역해서 사람들이 어떻게 응답하였는지를 기술하는 학문이다. K.Schilder의 구분에 따라 말하면 그리스도가 모이게 하는 회중(Conqeeatio)은 다른 면에서 보면 믿는 자들의 모임(Coetus)인 것이다. 교회사에서는 이 믿는 자의 모임(Coetus), 곧 우리 인간의 탐구해 가는 대상을 다루는 것이다. 그러니 교회사는 엄밀한 의미에서 신학(신에 대한 학문)은 아닌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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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속사적 성경 해석 A. 정의와 관계된 문제점 성경 본문을 바르게 읽는 자라면 성경에서 구속사를 회피할 수 없다. 그것은 성경이 만들어진 자체 과정이 이 구속사 사상을 유지하려는 데서 이루어졌기 때 문이다. 이 구속사가 어떻게 정의되든 구속사는 우리가 단순히 믿는 대로 삼위 일체 하나님이 인간을 위해 하신 모든 신적 행동을 총체하는 개념으로 특히 예 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하나님께서 성도의 공동체 생활을 하는 자기 백성에 대한 자기 계획을 실현하는 역사적 사실들의 총체를 의미한다. 이중에서 특히 예수 그리스도의 나심, 수난, 죽으심, 부활, 승천이 핵심이 되고 있다. 하나님께서 여러 선지, 여러 직분 등 계시 기관을 통해 성령으로 증거 하였으니 후대인들은 이 하나님의 계시와 사건들에 기초를 두고 믿음과 지식을 가지는 것이다. 이러한 역사적 사건들이 종말을 향한 직선적 시간 속에 여려 모양 방법으로 다 양성을 갖고 나타난다. 구약의 약속인 신약에서 성초되어졌듯이 동일한 말씀이 미래의 약속과 구속이 또한 그대로 이루어질 것으로 믿는다. 이러한 구속사에는 통일성과 함게 다양성이 있다. 구속사에 대한 성경을 믿는 자는 반대할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오늘날 현대 교회를 어지럽게 하는 것은 성경 해석학의 문제다. 과거 한국 교회가 여러 분파로 갈라서게 된 이유 중 근본적인 것 하나가 바로 성경해석문제였다. 또 이와 관련해서 우리가 성경 해석학의 문제를 생각하면서 구원사적 성경 해석 문제를 거론한다는 것은 큰 의의가 있다. 우리 시대가 처해 있는 신학적 혼란기 역시 성경 해석학의 문제에서 비록된 것이다. 이런 때의 우리 교회가 지향하는 방향이 무엇이냐를 음미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다행히 최근들어 우리 교회는 “구속사적 성경 해석”에 대한 지대한 관심을 갖게 되었다. 과연 이것이 우리의 해석 원리가 될 수 있을 것인가? 그런데 오늘날 해석학계에 “구속사”라는 말이 혼돈을 야기시키고 있다. 그것은 개혁주의자들만 이 아니라, 자유주의 신학자들도 구속사라는 말을 대단히 즐겨쓰고 있기 때문이다. 교의신학자 K.Barth,W.Pannennberg,신약학자 R. Bultmann, O. Cullmann은 물론 구약 학자 von Rad등이 즐겨 쓰는가 하면 심지어 교회사 학문에서도 구원사 교회사의 시대 구분을 지우는 것이 무엇이며, 정경의 구원론이 현재까지도 계속 되지 않는가 하는 문제에서 심각히 토론되고 있는 주제이기도 하다. 신교학자 들 뿐만 아니라 로마 카도릭 학자들도(K.Rah-ner)등 구속사를 심각하게 다룬다. 그리고 오늘날 신구교를 막론하고 엄습하고 있는 현재 여기서의 경험을 계시로 강조하는 신학들도 나름대로 구속사를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이 말의 사용의 빈번도와 선호와는 반대로 학자마다 구속사의 일관성 있는 분명한 의미를 보여 주지 않은 데 있는 것이다. 지금으로부터 반세기 전에 G.Weth가 이미 “구원사는 오늘날 많이 논쟁되는 말이다….. 이 개념은 의미와 취급은 곧 우리 현대 신학의 일반적 동요와 분열의 거울상이 된다. (Die Heilsgeschihte lhruniverse-ller und individueller Sinn in der offenbarungsges chichtlichen Theologie des 19 Jahrhunderts,(Munchen,1931, P.2) 하엿는데 이 말은 오늘날도 구대로 적용될 수 있다. 1959년에 와서는 이 말이 가져다 주는 불분명서이 더 이상 계속되지 않게 하기 위해서라도 신학 사 전에서 “구속사”란 말을 아예 제거해야 한다는 논문이 나왔는데 그것이 바로 K.G,Steck 가 쓴 “Die ldee derHeilsgeschichte”(in Theologische Studien, Heft 56 Rollikon, 1959)였다. Steck는 이 논문에서 J.C.H.K.V.Hofmann, A.Schlatter, O.Cullmann의 구원사 신학 개념을 개관하고서는 구원사의 말을 선호하려 하는 동기들에 대해 가치 있는 관찰을 하였던 것이다. “그런고로 구원사적 -요소들은 기독교 진리를 순전 히 사변적으로, 순전히 인간론적 -실존 철학적으로 전개하려는 시도들을 제지하는 것을 도와 주어야만 한다….기독교 지식의 열쇠로서 구원사 사상은 종교 개혁과 정통주의 교리 사상을 혐오하는 데서 자라오고, 또한 개혁 추구와 함게 가장 현대화하는 방편으로 더욱 신비적 기독교 이해를 하는 것이다”(동상 P.12) 라한다. 그리고 스테크는 쿨만이 구원사라는 열쇠를 갖고 고대 교회를 보았던 것에 대해 그것은 그리스도의 승천과 재림간의 구원사적 긴장을 생략해 버리는 듯한 키엘켈가드적인 “동시성”(Gleichzei-tigkeit)사상에 반대하여 또한 교회 시대를 아예 중간시대로 강조하는 로마 카톨릭주의에 반대하여 (Cullmann, Christus und die Zeit,1289) 계획된 것이라고 했다.(동상 P.43) 그래서 스테크 자신이 확정한 결론은 이렇다: 구원사상은 기독교 복음의 특징이며, 시대의 사상을 바르게 되도록 기여할 수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소위 간현주의(Doketismus)로 근절시키기 어려운 경향은 구원사적 사고가 아니고는 물리칠 수 없기 때문이다. (동상 P.52) 스테크의 이러한 말들에서 구원사 개념의 양면성이 더욱 분명히 나타나게 되었다. 그의 견해에 따르면 역사주의가 구원사적 사고 방식을 통해 신학에 진입하 게 되었다는 것이다. (동상 P.53). 더우기 구원사 사상은 우리에 대한 하나님의 구원을 “과거”에만 집착해서 연유를 삼는 반면에 “현대”와 연관시키는 데 별 로 성공하지 못한다고 지적하였다.(동상P.54). 그리고 우리가 하나님의 계시를 찾고 기대하는 것은 성경 본문 속에 살아 있는 복음의 음성 (Viva vox Evangel ij)안에서이지 역사 안에서는 아니라는 것이다. 하나님의 처우하심이 성육과 부 활 안에 수렴되어 있고, 그리고 이 처우하심이 “말씀”의 증거를 통해 우리와 접 촉한다는 것이다. 그러니 “그것이 (하나님의 처우) 역사 한에 들어와서 믿음으 로 만드는 것이 아니고 말씀 안에서 우리에게 증거되고 인봉되는 것”(동상P.61) 이라고 한다. 그리하여 스테크는 말하기를 “구원사 사상은 역사적인 최고의 인식탐구로 인정 되어 기독교 진리를 역사 개념의 수단으로 이해하고 증거해야 한다. 그러나 사 실적으로 그렇게 증명되지 못하는 것은 사람들이 그것을 잘못 사용하기 때문이 라는 것이다” (동상 P.61) 이와 같이 그의 말은 오늘날 신학 토론에서 신랄히 예각되어 있는 문제 곧 구원,혹은 진리, 혹은 말씀, 혹은 본문, 혹은 케리그마라고 하는 주제와 역사라 주제가 구원사 개념에 수렴되어 있다는 말이다. 다시 말하면 구원사 사상이 하 나의 신학적 개념으로 정착하여 그같은 원리들을 천착하여져서 우리의 해석학 원리로 나타나기에 앞서 구원사 개념이 강조된다는 아리스토적인 스콜라주의, 상태적인 정통주의며, 또한 역사에 대해 무관심을 나타내는 실존주의적 “동시 성”(gelijktijdigheid)에 반대하여 연유된 배경이 있다. 한마디로 말하면 구원 과 역사와의 관계이다. 이 둘이 서로 모순되는 것인가 아니면 서로 조화될 수 있는가 하는 문제인 것이다. 이것은 곧 진리를 이해함에 역사는 어떤 위치에 있는가 하는 것이다. 역사에 정당한 위치를 부여하지 않고 정경을 떠나서 역사 자체 안에서만 그 진리의 의미를 찾으려고 하면 구원사 개념에는 벌써 역사주의 가 개입하게 된다는 것이다. 구원사에 있어서 바로 이러한 역사의 문제가 오늘날 해석학의 주된 관심사가 되고 있는 것이다. 현대 신학의 실마리들이 얽혀 있다해도 과언이 아닌 이 구 원사 개념의 문제는 우리 스스로가 구원사적 전통을 견지하고 있다. 하여 무비 판적으로 성경자체에만 들어가서 구원사적 체계를 발전시킨다 해서 간단히 해 결될 문제가 아니다. 그러니 우리 입장에 일치하는 구원사적 원리들을 제시하기 앞서 구원 혹은 진리와 역사가 이해 되어져 왔는지를 살피는 것이 중요하다. 한마디로 말하면 “구속사”란 말 자체가 개혁주의적이라고는 할 수 없고 그렇게 소개된 적도 없다. 이 말 자채는 쉽게 여러 종류의 경험신학이며, 이성주의며, 실존주의며, 이단들에 연결되어 그 나름대로 사상체계를 세운다. 그러니 우리는 이런 것들을 구별해 낼 사명이 있는 것이다. 이런 작업을 1934년도에는 Nass S- childer 교수가 행하였다. 그 당시 바르트 신학이 개혁 교회에 스며들어올 때, Schilder 는 “역사의 본질과 가치에 대한 전혀 다른 개념이 변중신학과 개혁주의자들 간에 신학의 오류를 미리 간파하고 교회에 알려준 데는 스킬더 교수의 공로가 크다. 그리고 바르트의 역사 개념이 구약 해석학에 영향을 주었는데 이 영향 아래 쓰여진 것이 W.Vischer의 Das Christuszeugnis des Alten Testament 과 M.Hellbardt의 논문 Die Auslehung des Alten Testaments alstheologische Disziplin(ln Theologische Blatter 16, 1937 pp129-143)였다. 이들에 대해서 화란 개혁 구약 교수였던 N.Holwerda는 “설교에 있어서 구원사” (“De Heilshistorie in de prediking” Gere for meerd Theologisch Tijdschrift ,Aattea, novended 1942)에서 이들의 구원사 개념을 “가현적 해결”이라고 진단 했던 것이다. 그 이후 칼 바르트의 신학의 여러 분야에 영항을 미치자 그의 ” 교회 교의학”(kirchliche Dogmatik 1932)에 나타나는 “구원사”를 철저히 분석하 고 그것을 불트만의 실존적 의미의 구원사 개념과 비교하면서, 또한 칼 바르트 의 구원사 개념의 구약학자 폰라드의 전승사 개념에 미친 것을 보고 이를 서로 비교 분석한 학의 논문이 C.Trimp교수의 Om de Oeconomie vanhet Welbehagen( Goes: Oosterbaan s Le Cointre, 1961)였다. 그는 결론짓기를 바르트와 불트만에게는 본질적으로 같은 컨센서스(de eigenl- ijke Consensen)가 있다고 하였다(동상 p.191). 이쯤되면서 개혁 신학자들에게 는 구속사의 진리 규명에 있어서 변증 신학과 실존주의 신학, 전승사적 구약 해 석을 비교하면서 그 역사 개념을 정체를 구분할 수 있는 눈이 생기게 된 것이다. 그런데 우리 한국특히 고려 신학교를 중심해서 말하면 바르트 위기 신학이 한국 교회에 소개되고 브룬너가 1949년 말에 한국 교회에 와서 강의하자 고신 학우회는 이 신정통주의 신학과는 상관이 없음을 밝히는 성명서를 내었고 그 이듬 해 1950년 3월에 진리 운동 제 일호로 박윤선 교장이 “정통신학에서 본 바르트 와 브룬너의 위기신학”을 내놓았던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바르트 신학의 구원 사 개념의 역사를 의식하고 쓴 것은 아니고 단지 교의학적 측면에서 바르트 교의 와 웨스터 민스터 신조를 대조한 정도였다. 그러나 근래에 바르트 연구에서 박윤선 박사는 역사를 의식하나 그보다는 철학적 전제에서 바르트를 보고 있다(신학정론 1985). 요즘에 와서 윤리학 교수 이보민 교수는 “기독교 윤리학의 제 문제”(서울:기독 교 문서 선교회,1985)에서 해석학과 철학문제를 다루면서 이 역사의 문제를 상 당히 깊이 있게 다룬다. 그러나 그는 현대 철학적 인식 구조 속의 역사 개념을 초월적 지평(transcendental cricitisism)에 의해 파악하려는 데 힘썼고 성경 분문 속의 역사 개념을 다루지 아니했다. 그러나 나는 “구속사적 성경해석”( 서울:기독교문서 선교회, 1986)에서 성경 분문 속의 구원사의 역사 개념을 파악 하려 했던 것이다. 바로 이러한 문제가 오늘날의 해석학의 경계선과 과업이 무 엇이 되야 함을 시사해 준다고 하겠다. 그러므로 잠간 해석학의 본질이 무엇인지 규명하는 것이 우리 구원사 개념에 도움을 줄 것이다. 원래 해석학 하면 영어로 “hermeneutics”인데 이는 (snr 24: 27) 에서 온 것으로 “설명한다”,”주석해 내다”는 뜻이다. 이것은 단어 사전상으 로 볼 때 같은 의미를 가진 exegesis와 같이 직접적으로 본문에 관계되는 말이다. 그런데 오늘날 사람들은 “주석학”보다 “해석학”이란 말을 더 잘 사용하며 해석학이란 말이 어떤 권위가 있는 듯이 과대 평가하는 경항이 있다. 해석학의 원래 의도는 “주석의 이론”이란 뜻으로 해석학은 본문 자체에서 끄집어내는 이 론이며 학문이다. 그러므로 이론 자체는 계속 본문에 의해 양육 받고 교정받아 서 그것에 대한 사실적 해석이 되어져야 함이 마땅한데, 오늘날의 해석학은 그 보다는 이론적 체계를 독자적으로 확립하려는 것이다. 즉 본문을 떠난 이론 수립인 것이다. 개혁주의 주석가 S.Greijdanus는 1946년 에 이미 Schriftheginselenter Schriftverklaring(Kampen)을 쓸 때 이런 것을 예견이나 한 듯이 이렇게 말하고 있다. “해석함에 있어서 주석 자체는 그 작업 방식을 고려해야 한다” 그리고는 해석학은 그 성격상 “성경이 그 말씀하신 대로 그 뜻에 따라 해석되고 설명되는 방식에 관해서 하나님이 성경 안에서 계시하시 는 것을 따라야 한다(동상 p.6,7)고 했다. 그런데 오늘날 해석학은 이 고전적 의미를 떠나서 전혀 다른 방도로 나가고 있는 것이다. 우리 개혁주의 해석학은 B.Warfield가 말했듯이 선험적(apriori)작접이 아니라 경험적(a posteriori)작업이다. 어떤 인간적 전제로 해석하는 것이 아니라 본문을 연구해 본 결과로 나 오는 작업이란 뜻이다. 우리 개혁 주의는 본문에서 나온 진리 혹은 케리그마하 면 그것은 역사와 연관된곳으로 보며 여기에 어떤 역사간에 대립점을 찾지 않는다. 그러나 오늘날 해석학은 이 진리(케리그마)와 역사가 상치되어 있는 것으로 보 면서 , 또한 긴밀히 연락되어 있는 듯이 생각한다. 그러면서도 이 양자가 서로 조화를 이룬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 혹은 가능하다하는 것이 오늘날의 해석학과 구원사 이해에 난점을 주는 점이다. 이런 면을 우리는 역사적으로 살펴보고자 한다. < 구속사적 성경해석학 > – D. L. Baker 著 (원서명 : Two Testaments One Bible) Ⅰ. “구약적” 해결들 (A. von Ruler) 1. “이스라엘의 역사와 대단히 밀접하게 연결된 계시가 어떻게 해서 기독교회의 계시가 될 수 있겠는가? … 만일 구약성경이 기독교인들을 위한 계시가 된다고 한다면 그리스도인들은 이스라엘이든지 아니면 이스라엘과 관계를 갖든지 해야 한다. 그러한 방법으로써만 이스라엘에 발생한 것이 그들에게도 적용된다. … 구약의 계시가 이처럼 이스라엘의 역사에 근거하고 있기 때문에 그 계시는 이스라엘의 ‘재현’이 있을 때에만 충분히 전승될 수 있을 것이다.” (p.99~100) 2. “신약은 무엇보다도 사죄에 집중되어 있는 반면, 구약은 왕직에 집중되어 있고, 신약의 두드러진 사건 – 선택받은 백성이 메시야를 배척함 – 은 구약에서 예견되지 않은 것이며, 고난과 하나님의 사랑은 신약의 기조인 반면, 하나님의 진노와 영광은 구약의 기조이다. … 신약에는 한 가지 사죄 방법이 있을 뿐이지만 구약에는 많이 있으며, 신약에는 사도들이 열국으로 파송되고 있는 반면, 구약에는 열국들이 구원을 얻기 위해 이스라엘로 와야 했다.” (p.104) ☞ 판 룰러는 구약에는 많은 구속의 방도가 있었으나 신약에는 오직 한 가지 방도밖에는 없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대조에는 어느 정도 진리가 담겨있으나, 대속(substitution) 사상이 오직 신약에만 명백히 나타난다는 그의 진일보한 주장은 용납할 수 없는 것이다. 이와는 반대로 대속은 구약의 중요한 개념이다. “대속과 속죄가 의미하는 바를 이스라엘은 매우 잘 알고 있었다. 그들에게 알지 못하는 것이 있었다면 그것은 대속과 속죄가 어떻게 나사렛 예수 안에서 최종적으로 완성되는가 하는 것이었다.” (stamm, Cullmann, p.115) 3. “교회가 그리스도만을 전파해야 하는가? 라는 문제에 대한 답은 부정적이다. 왜냐하면, 그 나라를 설교하는 것 – 사실 그 나라 때문에 그리스도가 오셨다 – 이 더 근본적이기 때문이다.” (p.110 上) 4. “판 룰러는 창조론이 구원보다 더 근본적인 것이며, 그러므로 성화가 화목보다 더 크다고 전제한다. … 구약은 창조에 관심이 있으며 신약은 구원에 관심이 있다고 간주한다. 그러므로 자연적으로 구약이 신약보다 우월하다는 결론에 도달하게 된다.” (p.118) ☞ 성경 전체의 가르침에 대한 균형 잡힌 기독교적인 입장은 창조와 구원 모두 중요한 것이며, 어느 하나도 다른 하나가 없이는 존재할 수 없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다. (Toombs, p.120 上) 5. “이스라엘은 신정왕국으로 시작하였으며 교회가 신정왕국이 되었고, 신정왕국은 세상의 최종적인 기대이다. 이러한 사실을 근거로 이스라엘이 교회보다 더 중요하며, 구약이 신약보다 더 중요하다는 결론이 나온다는 것이다.” ☞ 구약이 하나님 나라의 상을 그리고 있을지라도 그 나라의 도래를 묘사하는 것은 신약이다. 그러므로 구약은 구원보다는 하나님의 나라를 다루고 있다는 사실을 근거로 구약이 신약보다 우월하다고 하는 것은 오류이다. (Wolff, p.122) 구약적 관점에서 보면 예수 그리스도는 최종적인 행위이지만 신약적 관점에서 보면 그는 역사의 중심이 되었다(Cullmann). 그러므로 신약은 단순히 구약의 진정한 의미를 해석하는 부록이 아니라 그의 백성 이스라엘의 역사에 나타난 하나님의 활동을 동일하게 기록한 것이며, 그러므로 하나님의 자기 전달 또는 자기 계시가 된다. (p.124) 6. “구약은 기독론적으로 해석할 것이 아니라 종말론적으로, 판 룰러의 표현으로는 신정왕국적으로 해석해야만 한다.” (p.120, 下) ☞ 이스라엘이 겪은 국가의 형식들 – 광야 공동체, 부족 동맹, 왕정정치, 포로 후기 공동체 등 – 가운데 어느 하나도 신정왕국을 성공적으로 표출한 것은 없었고 예수께서 오셔서야 마침내 하나님의 나라가 시작된다. 그러므로 신정왕국이 이스라엘의 전제라는 판 룰러의 주장은 재검토되어야 마땅하다. (Briezen, p.121) * “구약적” 해결들에 대한 정리 ☞ 판 룰러는 “신약은 무엇보다도 사죄에 집중되어 있는 반면, 구약은 왕직에 집중되어 있고, 신약의 두드러진 사건 – 선택받은 백성이 메시야를 배척함 – 은 구약에서 예견되지 않은 것이며, 고난과 하나님의 사랑은 신약의 기조인 반면, 하나님의 진노와 영광은 구약의 기조이다. … 신약에는 한 가지 사죄 방법이 있을 뿐이지만 구약에는 많이 있으며, 신약에는 사도들이 열국으로 파송되고 있는 반면, 구약에는 열국들이 구원을 얻기 위해 이스라엘로 와야 했다”고 주장한다(p.104). 왕이신 하나님께서는 무엇 때문에 만물과 사람을 창조하셨고, 무엇 때문에 사람들을 구원하시는가? 그것은 서로 인과관계를 맺고 있는 것이지, 서로 배타적이거나 더 우월한 문제라고 보아서는 안 될 것 같다. 메시야의 고난과 죽음에 대한 예언이 구약에 나타나지 않았는가? 하나님의 사랑과 진노와 영광은 구약과 신약에서 동일하지 않은가? 이 둘을(창조와 구원, 구약과 신약) 구분을 지어 생각하지만, 너무 분리시켜서 보지 않는 것이 좋겠다. ☞ 판 룰러는 구약은 하나님의 본래적이요 본질적이요 정경적인(규범적인) 말씀이며, 신약은 구약의 해석학적 부록(p.107)이라고 보면서 구약에서부터 신약으로의 계시의 발전이 없다고 하였는데, 구약의 감추어져 있었던 많은 희미한 부분들은 오히려 그리스도의 가르침과 그의 제자들을 통해서 확연히 드러나게 되었음을 인지(認知) 해야 할 것이다. 구약이 바라던 그리스도를 신약의 복음서들이 자세히 알려 주고 있으며, 서신서들을 통해서도 우리에게 확대.해석하여 주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면에서 구약으로부터 신약에로의 계시의 발전이 있다고 보여진다. 그러므로 구약과 신약의 관계를 단절시켜서 생각하기만 할 것이 아니라, 구약이 말하는 내용들이 자연적으로 신약으로 이어지는 신.구약성경의 통일성을 인정해야 할 것이다. ☞ 우리는 하나님의 창조와 구원이라는 둘 중의 하나를 가지고 어느 것이 더 우월한가를, 어느 것이 더 하나님께 있어서 더 소중하고, 또는 그렇지 않은가를 생각하기 보다는 하나님의 이루시는 모든 일(창조와 구원 모두를)을 동일하게 중시해야 한다. ☞ 구약의 이스라엘과 신약의 교회 모두는 하나님의 통치와 다스림을 받고 있다. 그것들은 외형상 완전하지도 않고 거룩하지도 않지만, 그럼에도 하나님의 다스림과 하나님의 통치에 의해 거룩하게 되어진다. 순서상으로 볼 때 이스라엘이 교회보다 먼저이며 구약이 신약보다 먼저인 것은 사실이지만, 교회와 신약 역시 간과되어 질 수 없으며, 창조와 구원은 동일하게 하나님의 계획에 있는 것이기 때문에 모두 중요하다. Ⅱ. “신약적” 해결들 (Rudolf Bultmann) 1. 불트만(Bultmann)은 구약이 기독교 역사의 일부(“그것은 지금까지 그래왔듯이 여전히 유대인들을 위한 책이다”)라고 주장하면서 구약을 거부한다. 그에게 있어서 구약은 기독교인의 경전은 아니지만 신약과 기독교의 전제인 것이다. 그에게는 이스라엘과 교회가 전혀 다른 별개의 실체이기 때문에 구약의 역사가 기독교의 역사가 될 수 없는 것이다. 불트만의 구약에 대한 이해는 신약과는 다른 율법에 불과한 것으로써 신약의 은혜와는 다르며, 기독교인들의 생활 규범에 관한 책이고, 그렇기 때문에 그것은 문자적으로만 사용되어야 하는 것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 구약의 내용들은 단지 신약과 기독교의 전제에 지나지 않는 것은 아니며, 하나님의 사역은 희미했던 구약 시대의 사건들을 통해서 더 확실하게 드러난 신약의 사건으로 나아갔던 것 뿐이다. 구약의 구원도 하나님을 믿는 믿음으로써 이루어진 것 같이 하나님의 사역은 구약과 신약에서 실제적으로 이루어 진 것이다. 또한 하나님은 여전히 구약의 율법을 통해 신약의 시대를 살아가는 그의 백성들에게 어떠한 방식으로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가를 알려주고 계신다. 구약은 보다 확실하게 드러난 신약 안에서 해석되어 질 수 있다. 2. 불트만은 예언과 성취에 대한 오늘날의 견해가 불가능한 것이라고 하면서 예언은 구약 역사의 실패에서 발흥된 약속으로 이해해야 한다(p.155)고 하는데, 구약의 역사는 그 내적인 자가당착, 곧 실패(Scheitern) 가운데서 성취된다는 것이다. 이것은 하나님의 은혜가 역사의 실패로 인해서 언약, 하나님의 나라, 하나님의 백성을 인식 불가능하게 됨으로써 자신들의 상황의 전적인 불가능을 인정하는 사람들에게만 주어지므로 그 실패는 곧 약속이 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성취는 실패인 역사 발전의 결과가 아니라 종말론적 새 창조인 하나님의 은혜와의 조우의 결과라는 것이다(p.153). 그에게 구약의 역사에는 하나님의 백성에 대한 이상과 경험적인 공동체의 실체 사이의 내적 모순이 있으며, 구약성경은 약속이 되어버린 역사의 실패를 기록한 신약의 전제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 성경에는 우리가 보기에 대조적인 것들과 서로 모순되어 보이는 내용들이 있다. 그러나 이러한 것들은 서로 완전히 다른, 상충되는 것들로 보기 보다는 신.구약 성경의 통일성 안에서 나타난 다양성으로 이해되어야 할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그의 인격 안에서 구약과 신약이라는 두 성경을 하나로 만들었으므로 우리는 그에게 집중해야 한다. Ⅲ. “성경적” 해결모색 1. G. Von Rad는 신약이 그 메시지를 표현하기 위해 구약을 필요로 하기 때문임을 증거할 목적으로 구약이 사용된 것은 아니라고 하면서 신약의 구약 사용으로 시작하지 않고, 구약이 어떻게 신약을 지향하는지를 보여주려고 한다. 그에게 있어 신약의 접근은 신.구약의 관계에 대한 일반적인 이해를 전제하면서 그 기초 위에 인용 또는 예증으로써 구약을 현실화(actualizing)하는 것이다. 신약과 구약에는 대조와 계속 모두 존재하는 것이다. Von Rad는 그리스도에 대한 우리의 지식은 구약의 증거 없이는 불완전하며, 구약을 그리스도에 대한 증거로 이해한다. (p.249, 257) ☞ 확실히 신.구약 성경은 어느 한쪽에 우월성을 둘 문제가 아니며, 신.구약 성경이 함께 어우러져서 확증하고 예증되어야 한다. C. H. Dodd는 구약이 과정이며 완결된 총체가 아님을 지적하고, 신약이 최종적인 것이라고 주장하는데, 교회는 구약을 영속시키며 신약을 시작케 하고, 구약의 주제가 공동체 이스라엘인 반면에 신약의 주제는 한 인물 예수 그리스도라는 점에서 두 성경 사이에 상이점이 있다고 지적한다. 그러나 구약과 신약 간의 연속성과 불연속성은 성경 내에 있는 본질적인 통일성과 부합하는 것임을 밝힌다. 구약은 신약과 함께, 오로지 함께만 기독교의 성경을 이룬다. 구약에는 난제들과 부조화가 포함되어 있으며, 그것은 성취의 빛 하에서만 정당하게 이해될 수 있다. 반면, 신약은 그 배경을 구약에 두며, 그 배경과 분리된다면 곡해된 형식으로 해석될 가능성이 있다(p.313). 구약에서의 하나님과 신약에서의 하나님은 여전히 세상과 역사, 모든 생활 가운데서 존재하시고 활동하시는 분이시다. 하나님은 여전히 창조하시고, 구속하시며, 섭리하시는 하나님으로서 존재하시는 것이다. 신.구약 성경에 어떤 면으로는 대조적으로 보이는 모습이, 어떤 면에서는 계속되는 모습이 함께 나타나고 있는 것이지, 그것들이 따로 분리되어서 서로 다른 것을 말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2. Von Rad는 의미를 지닌 역사(Geschichte)와 시.공간의 한 지점에 발생한 역사(Historie)를 구분하면서 성경을 일반적인 진리의 제시 또는 역사 탐구의 자료가 아니라 역사 가운데 나타난 하나님의 구원 활동에 대한 증거로 이해한다(p.258). 그런데, 암슬러의 신.구약의 관계 문제에 대한 해결은 다소간 Von Rad의 그것과 유사한데, 구원사로 전 구약을 해석하려는 그의 관심은 마치 Von Rad처럼 그도 이러한 관점에 적합하지 않는 모든 것을 부정적으로 평가하는 것과 같은 것이 되어버렸다(p.289). ☞ 신.구약 성경에 대한 관심을 ‘구속사’에 두는 것은 옳은 관점에 속할 것이다. 왜냐하면 신.구약 성경이 하나의 구속사를 형성하고 있기 때문이다(Von Rad는 ‘구속사’라는 개념은 끊임없이 뚫고 들어오는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 하나님의 정하신 목표 지점을 향해 움직여 나가는 일련의 역사 과정으로 묘사된다고 한다 -「구약해석학」p.28). 그러나 구속사만을 오직 신.구약 성경의 모든 것이라고 말할 수는 없으며, 구속사 또한 신.구약 성경 전체적인 맥락 속에서 생각되어야 할 것이다. 그 안에서 우리는 여러 가지를 말할 수 있고, 가장 큰 물줄기(하나님 나라, 왕국)를 발견할 수 있다. 3. 신.구약 성경의 관계에서 구약을 해석하는 방법으로 유형론을 많이 사용하고 있는데, 그것은 역사적이고 실제적인 상응을 암시하는 것으로써 세부적인 대구(對句)에 관심을 두지 않고 근본적인 원리와 구조의 일치에 관심을 두는 것이다. Amsler와 Gundry는 유형론의 기초가 하나님의 역사 운행이라고 본다(p.237). 이것은 유형론의 기능이 구약 사용의 절차를 제시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백성들의 경험 가운데 나타난 하나님의 일관성 있는 활동을 지적하는 것이다. 그러나 구약의 모든 부분들이 유형론적으로 해석되어지는 것은 아니다. Th. C. 프리젠은 해석에서와 마찬가지로 설교에서는 구약과 신약을 동일시해서도 분리해서도 안 되며, 다른 것을 희생시키며 어느 하나를 지나치게 강조해서도 안 된다고 주장하면서 두 성경 모두 창조부터 절정까지 하나님의 인간과의 교통에 대한 증거의 부분으로 인식해야 함을 말한다(p.304). ☞ 하나님의 사역하시는 방법이 외형상으로 볼 때는 신.구약에 있어서 차이가 있는 듯 하지만 여전히 동일한 목적을 향해 그 모든 것이 움직이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구약의 방법과 신약에서의 방법을 가지고 완전히 다른 두 개의 것을 말한다기보다는 서로 보완하며 충족시키는 면에서 바라 볼 필요가 있겠다. 구약의 내용들이 보잘 것 없거나 불필요 했던 것이 아니며, 신약만이 우수하고 뛰어난 것은 아니다. 구약에서의 방법이 실패한 것도 아니고, 신약만을 홀로 필요로 해야 하는 것은 아니다. 하나님의 열심이 드러나 있는 구약과 신약이 모두 필요하다. 구속사적 성경 해석.hwp 출처 : 개혁하는 교회(기독신학연구실) 글쓴이 : 청지기 원글보기 : 청지기 메모 : 감사합니다..


구속사적 관점 영어 | 원어성경에 입각한 구속사적 설교1-1(영어설교) 상위 166개 답변 – Sk.taphoamini.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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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속사적 성경해석 박종철교수(고신대) A. 정의와 관계된 문제점 성경 본문을 바르게 읽는 자라면 성경에서 구속사를 회피할 수 없다. 그것은 성경이 만들어진 자체 과정이 이 구속사 사상을 유지하려는 데서 이루어졌기 때 문이다. 이 구속사가 어떻게 정의되든 구속사는 우리가 단순히 믿는 대로 삼위 일체 하나님이 인간을 위해 하신 모든 신적 행동을 총체하는 개념으로 특히 예 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하나님께서 성도의 공동체 생활을 하는 자기 백성에 대한 자기 계획을 실현하는 역사적 사실들의 총체를 의미한다. 이중에서 특히 예수 그리스도의 나심, 수난, 죽으심, 부활, 승천이 핵심이 되 고 있다. 하나님께서 여러 선지, 여러 직분 등 계시 기관을 통해 성령으로 증거 하였으니 후대인들은 이 하나님의 계시와 사건들에 기초를 두고 믿음과 지식을 가지는 것이다. 이러한 역사적 사건들이 종말을 향한 직선적 시간속에 여려 모양 방법으로 다 양성을 갖고 나타난다. 구약의 약속인 신약에서 성초되어졌듯이 동일한 말씀이 미래의 약속과 구속이 또한 그대로 이루어질 것으로 믿는다. 이러한 구속사에는 통일성과 함게 다양성이 있다. 구속사에 대한 성경을 믿는 자는 반대할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오늘날 현대 교회를 어지럽게 하는 것은 성경 해석학의 문제다. 과거 한국 교회가 여러 분파로 갈라서게 된 이유 중 근본적인 것 하나가 바로 성경해석문제였다. 또 이와 관련해서 우리가 성경 해석학의 문제를 생각하면서 구원사적 성경 해석 문제를 거론한다는 것은 큰 의의가 있다. 우리 시대가 처해 있는 신학적 혼란기 역시 성경 해석학의 문제에서 비록된 것이다. 이런 때의 우리 교회가 지향하는 방향이 무엇이냐를 음미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다행히 최근들어 우리 교회는 “구속사적 성경 해석”에 대한 지대한 관심을 갖게 되었다. 과연 이것이 우리의 해석 원리가 될 수 있을 것인가? 그런데 오늘날 해석학계에 “구속사”라는 말이 혼돈을 야기시키고 있다. 그것은 개혁주의자들만 이 아니라, 자유주의 신학자들도 구속사라는 말을 대단히 즐겨쓰고 있기 때문이다. 교의 신학자 K.Barth,W.Pannennberg,신약학자 R. Bultmann, O. Cullmann은 물론 구약학자 von Rad등이 즐겨 쓰는가 하면 심지어 교회사 학문에서도 구원사 교회사의 시대 구분을 지우는 것이 무엇이며, 정경의 구원론이 현재까지도 계속 되지 않는가 하는 문제에서 심각히 토론되고 있는 주제이기도 하다. 신교학자 들 뿐만 아니라 로마 카도릭 학자들도(K.Rah-ner)등 구속사를 심각하게 다룬다. 그리고 오늘날 신구교를 막론하고 엄습하고 있는 현재 여기서의 경험을 계시로 강조하는 신학들도 나름대로 구속사를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이 말의 사용의 빈번도와 선호와는 반대로 학자마다 구속사의 일관성 있는 분명한 의미를 보여 주지 않은 데 있는 것이다. 지금으로부터 반세기 전에 G.Weth가 이미 “구원사는 오늘날 많이 논쟁되는 말이다….. 이 개념은 의미와 취급은 곧 우리 현대 신학의 일반적 동요와 분열의 거울상이 된다. (Die Heilsgeschihte lhruniverse-ller und individueller Sinn in der offenbarungsges chichtlichen Theologie des 19 Jahrhunderts,(Munchen,1931, P.2) 하였는데 이 말은 오늘날도 구대로 적용될 수 있다. 1959년에 와서는 이 말이 가져다 주는 불분명서이 더 이상 계속되지 않게 하기 위해서라도 신학 사 전에서 “구속사”란 말을 아예 제거해야 한다는 논문이 나왔는데 그것이 바로 K.G,Steck 가 쓴 “Die ldee der Heilsgeschichte”(in Theologische Studien, Heft 56 Rollikon, 1959)였다. Steck는 이 논문에서 J.C.H.K.V.Hofmann, A.Schlatter, O.Cullmann의 구원사 신학 개념을 개관하고서는 구원사의 말을 선호하려 하는 동기들에 대해 가치 있는 관찰을 하였던 것이다. “그런고로 구원사적 -요소들은 기독교 진리를 순전히 사변적으로, 순전히 인간론적 – 실존 철학적으로 전개하려는 시도들을 제지 하는 것을 도와 주어야만 한다….기독교 지식의 열쇠로서 구원사 사상은 종교 개혁과 정통주의 교리 사상을 혐오하는 데서 자라오고, 또한 개혁 추구와 함께 가장 현대화하는 방편으로 더욱 신비적 기독교 이해를 하는 것이다”(동상 P.12)라 한다. 그리고 스테크는 쿨만이 구원사라는 열쇠를 갖고 고대 교회를 보았던 것에 대해 그것은 그리스도의 승천과 재림간의 구원사적 긴장을 생략해 버리는 듯한 키엘켈가드적인 동시성”(Gleichzei-tigkeit)사상에 반대하여 또한 교회 시대를 아예 중간시대로 강조하는 로마 카톨릭주의에 반대하여 (Cullmann, Christus und die Zeit,1289) 계획된 것이라고 했다.(동상 P.43) 그래서 스테크 자신이 확정한 결론은 이렇다: 구원사상은 기독교 복음의 특징이며, 시대의 사 상을 바르게 되도록 기여할 수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소위 간현주의(Doketismus)로 근절시키기 어려운 경향은 구원사적 사고가 아니고는 물리칠 수 없기 때문이다.(동상 P.52) 스테크의 이러한 말들에서 구원사 개념의 양면성이 더욱 분명히 나타나게 되었다. 그의 견해에 따르면 역사주의가 구원사적 사고방식을 통해 신학에 진입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동상 P.53). 더욱이 구원사 사상은 우리에 대한 하나님 의 구원을 “과거”에만 집착해서 연유를 삼는 반면에 “현대”와 연관시키는 데 별 로 성공하지 못한다고 지적하였다.(동상P.54). 그리고 우리가 하나님의 계시를 찾고 기대하는 것은 성경 본문 속에 살아 있는 복음의 음성 (Viva vox Evangel ij)안에서이지 역사 안에서는 아니라는 것이다. 하나님의 처우하심이 성육과 부활 안에 수렴되어 있고, 그리고 이 처우하심이 “말씀”의 증거를 통해 우리와 접촉한다는 것이다. 그러니 “그것이 (하나님의 처우) 역사 한에 들어와서 믿음으로 만드는 것이 아니고 말씀 안에서 우리에게 증거되고 인봉되는 것”(동상P.61) 이라고 한다. 그리하여 스테크는 말하기를 “구원사 사상은 역사적인 최고의 인식 탐구로 인정 되어 기독교 진리를 역사 개념의 수단으로 이해하고 증거해야 한다. 그러나 사 실적으로 그렇게 증명되지 못하는 것은 사람들이 그것을 잘못 사용하기 때문이 라는 것이다” (동상 P.61) 이와 같이 그의 말은 오늘날 신학 토론에서 신랄히 예각되어 있는 문제 곧 구 원,혹은 진리, 혹은 말씀, 혹은 본문, 혹은 케리그마라고 하는 주제와 역사라 주제가 구원사 개념에 수렴되어 있다는 말이다. 다시 말하면 구원사 사상이 하 나의 신학적 개념으로 정착하여 그 같은 원리들을 천착하여져서 우리의 해석학 원리로 나타나기에 앞서 구원사 개념이 강조된다는 아리스토적인 스콜라주의, 상태적인 정통주의며, 또한 역사에 대해 무관심을 나타내는 실존주의적 “동시성”(gelijktijdigheid)에 반대하여 연유된 배경이 있다. 한마디로 말하면 구원 과 역사와의 관계이다. 이 둘이 서로 모순되는 것인가 아니면 서로 조화될 수 있는가 하는 문제인 것이다. 이것은 곧 진리를 이해함에 역사는 어떤 위치에 있는가 하는 것이다. 역사에 정당한 위치를 부여하지 않고 정경을 떠나서 역사 자체 안에서만 그 진리의 의미를 찾으려고 하면 구원사 개념에는 벌써 역사주의 가 개입하게 된다는 것이다. 구원사에 있어서 바로 이러한 역사의 문제가 오늘날 해석학의 주된 관심사가 되고 있는 것이다. 현대 신학의 실마리들이 얽혀 있다해도 과언이 아닌 이 구 원사 개념의 문제는 우리 스스로가 구원사적 전통을 견지하고 있다. 하여 무비 판적으로 성경자체에만 들어가서 구원사적 체계를 발전시킨다 해서 간단히 해 결될 문제가 아니다. 그러니 우리 입장에 일치하는 구원사적 원리들을 제시하기 앞서 구원 혹은 진리와 역사가 이해 되어져 왔는지를 살피는 것이 중요하다. 한마디로 말하면 “구속사”란 말 자체가 개혁주의적이라고는 할 수 없고 그렇게 소개된 적도 없다. 이 말 자채는 쉽게 여러 종류의 경험신학이며, 이성주의며, 실존주의며, 이단들에 연결되어 그 나름대로 사상체계를 세운다. 그러니 우리는 이런 것들을 구별해 낼 사명이 있는 것이다. 이런 작업을 1934년도에는 Nass S- childer 교수가 행하였다. 그 당시 바르트 신학이 개혁 교회에 스며들어올 때, Schilder 는 “역사의 본질과 가치에 대한 전혀 다른 개념이 변중 신학과 개혁주 의자들간에 신학의 오류를 미리 간파하고 교회에 알려 준 데는 스킬더 교수의 공로가 크다. 그리고 바르트의 역사 개념이 구약 해석학에 영향을 주었는데 이 영향 아래 쓰여진 것이 W.Vischer의 Das Christuszeugnis des Alten Testament 과 M.Hellbardt의 논문 Die Auslehung des Alten Testaments alstheologische Disziplin(ln Theologische Blatter 16, 1937 pp129-143)였다. 이들에 대해서 화란 개혁 구약 교수였던 N.Holwerda는 “설교에 있어서 구원사” (“De Heilshistorie in de prediking” Gere for meerd Theologisch Tijdschrift ,Aattea, novended 1942)에서 이들의 구원사 개념을 “가현적 해결”이라고 진단 했던 것이다. 그 이후 칼 바르트의 신학의 여러 분야에 영항을 미치자 그의 ” 교회 교의학”(kirchliche Dogmatik 1932)에 나타나는 “구원사”를 철저히 분석하 고 그것을 불트만의 실존적 의미의 구원사 개념과 비교하면서, 또한 칼 바르트 의 구원사 개념의 구약학자 폰라드의 전승사 개념에 미친 것을 보고 이를 서로 비교 분석한 학의 논문이 C.Trimp교수의 Om de Oeconomie vanhet Welbehagen( Goes: Oosterbaan s Le Cointre, 1961)였다. 그는 결론짓기를 바르트와 불트만에게는 본질적으로 같은 컨센서스(de eigenl- ijke Consensen)가 있다고 하였다(동상 p.191). 이쯤 되면서 개혁 신학자들에게 는 구속사의 진리 규명에 있어서 변증 신학과 실존주의 신학, 전승사적 구약 해 석을 비교하면서 그 역사 개념을 정체를 구분할 수 있는 눈이 생기게 된 것이다. 그런데 우리 한국 특히 고려 신학교를 중심해서 말하면 바르트 위기 신학이 한 국 교회에 소개되고 브룬너가 1949년 말에 한국 교회에 와서 강의하자 고신 학우회는 이 신정통주의 신학과는 상관이 없음을 밝히는 성명서를 내었고 그 이듬 해 1950년 3월에 진리 운동 제 일호로 박윤선 교장이 “정통 신학에서 본 바르트 와 브룬너의 위기신학”을 내놓았던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바르트 신학의 구원 사 개념의 역사를 의식하고 쓴것은 아니고 단지 교의학적 측면에서 바르트 교의 와 웨스터 민스터 신조를 대조한 정도였다. 그러나 근래에 바르트 연구에서 박 윤선 박사는 역사를 의식하나 그보다는 철학적 전제에서 바르트를 보고 있다( 신학 정론 1985). 요즘에 와서 윤리학 교수 이보민 교수는 “기독교 윤리학의 제 문제”(서울:기독 교 문서 선교회,1985)에서 해석학과 철학 문제를 다루면서 이 역사의 문제를 상 당히 깊이 있게 다룬다. 그러나 그는 현대 철학적 인식 구조 속의 역사 개념을 초월적 지평(transcendental cricitisism)에 의해 파악하려는 데 힘썼고 성경 분문 속의 역사 개념을 다루지 아니했다. 그러나 나는 “구속사적 성경 해석”( 서울:기독교문서 선교회, 1986)에서 성경 분문 속의 구원사의 역사 개념을 파악 하려 했던 것이다. 바로 이러한 문제가 오늘날의 해석학의 경계선과 과업이 무 엇이 되야 함을 시사해 준다고 하겠다. 그러므로 잠간 해석학의 본질이 무엇인지 규명하는 것이 우리 구원사 개념에 도움을 줄 것이다. 원래 해석학 하면 영어로 “hermeneutics”인데 이는 (snr 24: 27) 에서 온 것으로 “설명한다”,”주석해 내다”는 뜻이다. 이것은 단어 사전상으 로 볼 때 같은 의미를 가진 exegesis와 같이 직접적으로 본문에 관계되는 말이다. 그런데 오늘날 사람들은 “주석학”보다 “해석학”이란 말을 더 잘 사용하며 해석학이란 말이 어떤 권위가 있는 듯이 과대평가하는 경항이 있다. 해석학의 원래 의도는 “주석의 이론”이란 뜻으로 해석학은 본문 자체에서 끄집어내는 이 론이며 학문이다. 그러므로 이론 자체는 계속 본문에 의해 양육 받고 교정받아 서 그것에 대한 사실적 해석이 되어져야 함이 마땅한데, 오늘날의 해석학은 그 보다는 이론적 체계를 독자적으로 확립하려는 것이다. 즉 본문을 떠난 이론 수립인 것이다. 개혁주의 주석가 S.Greijdanus는 1946년 에 이미 Schriftheginselenter Schriftverklaring(Kampen)을 쓸 때 이런 것을 예견이나 한 듯이 이렇게 말하고 있다. “해석함에 있어서 주석 자체는 그 작업 방식을 고려해야 한다” 그리고는 해석학은 그 성격상 “성경이 그 말씀하신 대로 그 뜻에 따라 해석되고 설명되는 방식에 관해서 하나님이 성경 안에서 계시하시 는 것을 따라야 한다(동상 p.6,7)고 했다. 그런데 오늘날 해석학은 이 고전적 의미를 떠나서 전혀 다른 방도로 나가고 있는 것이다. 우리 개혁주의 해석학은 B.Warfield가 말했듯이 선험적(apriori)작접이 아니라 경험적(a posteriori)작업이다. 어떤 인간적 전제로 해석하는 것이 아니라 본문을 연구해 본 결과로 나 오는 작업이란 뜻이다. 우리 개혁 주의는 본문에서 나온 진리 혹은 케리그마하 면 그것은 역사와 연관된곳으로 보며 여기에 어떤 역사간에 대립점을 찾지 않는다. 그러나 오늘날 해석학은 이 진리(케리그마)와 역사가 상치되어 있는 것으로 보 면서 , 또한 긴밀히 연락되어 있는 듯이 생각한다. 그러면서도 이 양자가 서로 조화를 이룬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 혹은 가능하다하는 것이 오늘날의 해석학과 구원사 이해에 난점을 주는 점이다. 이런 면을 우리는 역사적으로 살펴보고자 한다. B. 구속사적 해석의 역사-케류그마와 역사와의 관계에서 1. 고대 교회 안디옥파와 알렉산드리아파의 해석의 차이들도 결국 역사와 진리 문제였다. 문자적 역사적 면을 강조한 것이 안디옥파라하면 후자는 역사를 의도 적으로 무시하고 역사적인 것은 우연적이고, 유동적이라서, 역사는 결정된 진리를 결코 포함할 수 없다는 것이다. 오직 영원한 실재성 같은 이상 세계가 성경 이야기 속에 반영된다 하였다. 그래도 이것은 본문 안에 머물면서 영원한 영의 의미를 찾는 수단과 방법을 모색하였던 것이다. 2. 중세기 해석학 역시 상태적인(동태적이 아닌)말씀 세계를 개진하려 했던 것이다. 사물의 본질적인 의미는 말씀안에 밀착되어 있고 말씀 안에서 연구되었다. 역사는 이미 주어진 화폭에서 더 발전시키는 정도에 지나지 않았다. 역사는 시간 속에 있는 하나님의 임재였으나 하나님을 알기 위해서는 신구약의 역사를 빠뜨릴 수 없었던 것이다. 그러니 근본적인 화폭은 전 포괄적인 말씀 세계 그것 이었다. 3. 종교 개혁 당시는 역사의 문제가 신랄히 도전받게 되었다. 중세기 성당의 격납고는 허물어지고 인간은 벌거벗은 채 하늘 아래 서서 다시 구원 문제를 서슴 없이 새로이 진술하는 시기였다. 현재의 구원을 묻는 형편에서 볼 때 종교 개혁 당시의 사람은 과거의 구원을 물었던 중세인보다 훨씬 강했던 것이다. 역사의 문제는 이 구원 문제보다 더 강인해서 자기가 맏는 바의 구원의 객관성을 구원 사역의 역사적 객관성과 성경 본문에로 더 강하게 지향하고 있었던 것이다. 4. 종교 개혁 이후의 oethodoxie 기독교는 종교 개혁의 진리와 유산을 보존하고 교정한다는 것이 불가피하게 해석학상의 치명타를 초래한 것이다. 진리의 객 관성을 필요로 한다는 것이 한편으로는 신앙 진리 내용의 항목들(logi)을 각도 에 따라 정확히 분류하고 공식화하는 대로 경주하고 또 다른 한편으로는 신앙 이러한 진리를 나타내기 위한 새로운 신임할 만한 격식 구조(kader)를 찾았던 것이다. 진리를 논함에 역사는 단지 “운송자”(dragster)였고 아직 계시의 원천은 아니었다. 그럼에도 이러한 그들의 사고 공격에 치명타를 가져왔던 것은 점점 자기 들 신학의 생기를 빨아먹는 색객이 하나 생겼다는 것이다. 즉 역사라는 습지속으로 빠져들어감으로 진리가 그 늪은 헤어나지 못하고 신임할 만한 기초를 상실 하는 지경으로 나간 것이다. 5. 동일한 17세기에 이러한 오스독스한 기독교의 객관적인 성경 해석에 반대하여 개인적 경건, 회심과 중생을 강조하는 주관적의적 경건주의가 나타났다. 이 들에게는 성경이 주관적의적 경험의 수집으로 보였던 것이다. 6. 합리주의(17세기)에서는 이성이 만물의 척도로 군림하여 더 좋은 것을 확립 한다고 할진대 역사가 어찌 더 좋은 것을 말할 수 있겠는가? 당시 추상적인 것 과 합리적 이성적 이념만을 추구하는 과정에서 불가피한 결론은 신앙 진리와 역사상(상)이 근본적으로 갈라서게 되는 것이었다. 합리주의는 일반적인 것을 , 객관적인 것을 실재, 본질적인 것으로 생각하고 이 일반적인 것을 특별한 역사 적인 옷에서 출발하고 도출해 내야 한다고 함으로 진리와 역사를 연결, 조화시 키려고 하였다. 그러나 큰 대가를 치루어야 했던 것은 성경이 부차적인 것이 되 어 존경스럽기는 하나 오리무중의 것이 되고 만 것이다. 7. 낭만주의 새대에 역사가 겨우 색깔 없는 일반적 진리를 색깔 있게 해주는 정도 이상의 것이 아니라고 하여 역사를 부당하게 취급하였다. 그리하여 역사적 전통과 권위를 중히 여기는 복고주의로(예컨대 중세기에서와 같이)나간 것이다. 8. 19세기에 계속 역사적 탐구의 기적을 만들어 보려 했으나, 문제가 작아지기는 커녕 오히려 커졌다. 이때에 사람들은 두 가지 사실을 발견했는데 하나는 그 결과 역사와 같은 학문의 가능성을 의심함과 동시에 역사는 진리를 끝없이 상대 화하는 대로 치닫고 있었다는 점이다. 이 결과 역사 안에서 진리를 찾으려는 일반적 흐름은 회의주의로 종착되고 말았다. 우리가 19세기를 더욱 자세히 살펴보아야 하는 것은 어떤 의미에서 19세기를 더욱 해석학적 문제들이 너무나 진지하여 20세기는 이에 대한 답변을 해주려는 시도인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그는 성경을 무미건조하게 이성적으로만 읽고 역사적 삶의 이해 없이 읽는 것 을 반대했다. 그는 “히브리서의 정신에 대해”(Vom Geist der hebraischen poe- sie) 그는 인간성의 원시 정초의 언어에서 인간성의 발로에서 신의 언어를 발견했다. 성경을 이해하는 길을 헤르더가 천화성(Congenialiteit)으로 본 것은 이해하는 문제보다 생을 포괄하는 감정 문제로 보았기 때문이다. 감정을 통한 직 접적 파악, 이것은 영혼의 삶을 통해 그 당시 일어난 것에 집착하게 된다는 것 인데 바로 이런 것이 결정적 의미를 파악케 하는 해석학적 원리들이라고 한다. 어떤 방식으로 어떤 관계로 역사가 오늘 우리에게 의미를 갖는가? 각 시대가 다른 시대와는 관련 없이도 그 자체 의미를 가지는 것은 아니다. 역사의 의미는 역사의 전체적 한계에 의해 정확한 모습을 가지다. 즉 역사는 성장하는 성육 과정이며, 내 존재도 여기 한 지체에 각 시대와 각 민족도 각각 여기에 공헌하고 있다. 그러므로 역사란 하나의 발전이며, 과거란 인간성이 자라는 시대들의 연 속이다. 구약은 인간성은 유년기요 지금 우리는 청년기에 있다는 것이다. 그러니 Herder는 이성으로 모든 것을 판단했던 계몽 시대와는 달리 오늘의 삶 이 참여함으로서 고대 문서와 나와의 교류로 넘어가야 한다고 하였다. 여기에 성경 해석에 과거에 볼 수 없었던 새로운 국면이 생긴 것인데 좋게 말해 서 역사적 탐구가 부상되면서 철학적 해석학적 근거가 되고 있다는 점이다. 즉 인간은 역사를 찾는다. (historein)하여 자연 역사적 존재가 된 것이다. 그러나 이 역사 안에서 진리를 찾는다고 할 대 그 진리란 절대적일 수가 없는 상대주의와 내재주의에 빠지게 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신학적으로 말해 역사 안에서 신적인 것과 인간적인 것이 구별되지 않는 가운데 이성 (ratio)과 법칙(history)간에 추가 오고가는 것이 19세기의 경향이다. 그런데 현대 해석학의 교조라고 할 수 있는 Schleiermacher에 와서는 역사 뿐만 아니라 법칙과 지식의 모든 영역에 신학의 가능성의 문호를 개방한 것이다. 그 기초를 그는 “인간의 신의식”으로 보았다., 이 과거(역사)을 오늘의 것으로 연결시키는 방법이 슈라이 막허의 divinatie 이라고 하는 심리학적 해석이다. 이 심리학적 요소를 극복하고 역사적 형식들을 강조하는 Dithey의 Ausdruck 곧 표현의 이론들은 현대 해석자가 과거 역사를 이해하고 연결시켜 보려는 것이었다. 이러한 세속주의적 성경 해석에 반대하면서도 이들의 영향을 벗어나지 못한 학 자로서 19세기 후반기의 J.T.Beck(1804-1878) 와 J.C.K Hofmann(1810-1879)을 말하지 않을 수 없다. 이들도 진공 상태에서 시작한 것이 아니다. 그들에게도 역사적 전임자들이 있었다. 종교 개혁 후의 연방 신학 (Foderoltheologie)을 주장한 Johannes Coc-cejus(1603-1669)는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역사를 계약 체결의 연속으로 이해했다. 레이든 신학자였던 그는 합리주의적 접근과 스콜라 주의적 방법에 반대하여 성경 방식대로 언약과 하나님 왕국 언어로 연구하였다. 그러므로 칵세우스는 성경의 역사적 성격에 대해 관심을 가짐으로 구원사적 의도를 가졌던 것이다. 그러나 그는 성경 주석을 함에 있어 조직화함으로써 여러 가지 탈선을 하게 되었는데 예컨대 스스로 시대 구분하여 구약 시대에는 실제적 죄 용서가 불가능 한 것으로 보았던 것이다. 이러한 시대 구분은 지상의 천년 왕국론 사상을 잉 태하게 되었는데 그것은 오늘날 미국의 세대주의 사상과 비교될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그에게는 영원한 하나님 구원이 역사화되었던 것이다. 또한 독일 경건주의학자였던 Jonann Albrecht Bengel이 있다. 그의 Gnomon은 유명한데 그 당시 경직된 교회가 새 생명의 길로 가는 하나는 성경 자체로 돌아 가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더욱 신빙성 있는 신약 본문을 만들어 내려고 하였던 것이다. 그의 해석 윈리 하나는 성경은 살아 있는 유기체인 고로 그 부분들이 문법적 만 해석될 뿐만 아니라 역사적으로 해석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자기 왕국 계시 직전에 이 말씀 다음 말씀, 이 단계 다음 단계를 샅샅이 살펴 각 시대에 주어진 하나님 계시가 우리 성도들의 것이 되도록 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니 연대가 성경 계시에 중요한 요소를 구성하고 있다. 어떤 주제 (예컨대 그의 Suntagma de Sanctitate Dei에서 “거룩”을 다룸) 를 다룰 때에도 세기를 통해 하나님이 자기 백성을 취급하는 성경 이야기에 따라 추구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벵겔의 본문 연구는 오늘날 우리가 사용하는 신약성경의 본문 비평에 많은 기여를 하였으며 그의 주제 연구는 Kittel의 신학 어휘 사전 등에 자극을 주었다. 또 그의 역사적 요소에 대한 의식은 Hofmann의 구원사 사상 뿐만 아니 라 오늘까지도 진행되는 예수 생애 탐구 (Leben Jesu Forschung)의 길을 터놓았던 것이다. 이러한 전임자들의 생각과 당시의 사상을 배격해서 베크는 우선 세속적 해석학에 반대하여 성경 영감 교리를 재건하려 했다. 그는 지나간 단계 들에서 신적 진리가 무엇보다도 성경 안에서 재현되었다고 보았다. 하지만 인간성 안에는 작용하므로 도덕적 성숙의 과정을 밟았다고 하므로 그는 진리와 역사 문제를 – 1750년 이후 슈라이 막허 이후부터 상당히 양자가 별거 되었었는데 – 다시 긴밀히 연관시키려고 하여 성경 역사와 인간 역사를 하나의 큰 과정으로 연결시켰다. 그러나 이것은 영원한 이성 – 진리의 개념으로나 슈라이 막허적인 하나님 의식 역사로 하는 것이 아니고, 역사 안에 작용하는 말씀에서 연결시키는 것이다. 그리하여 베크는 역사적 탐구 방법에 위치를 부여하려 하는데 몸에 관한 것은 언어와 역사 같은 외적인 것인데 이것은 필요하긴 하나 완전한 이해로는 이끌지 못한다는 것이다. “혼”은 심릭학에 관계되는 것인데 친근성에 관계되는 것 이라고 한다. “영”은 성경 해석의 깊은 것 곧 “심령적 해석”(pneumatische uitlegging)으로 앞 양자를 포함하는 핵심적인 것이라고 한다. 그리하여 “성경 자체의 영은 그 해석자이다”라고 함으로 역사적 비평의 위험 이 예기되는 것이며, 성경의 사건들을 역사와 연관시킨 것이다. 그러므로 베크는 일반 역사와 성경 역사가 하나님 왕국의 유기적 -역사적 발전 에 의해 서로 수용된다고 본 것이다. 이점에서는 Erlangen 학파의 대표였던 Hofmann(1810-1877)도 마찬가지 였는데 그는 역사 안에 구원사 (Histori)가 현존함을 보고 또한 구원사의 진전을 말한 다. 그래서 역사가 계시가 되고 계시가 역사가가 되는 것이다. 이런 생각에서는 역사란 그 자체가 계시 능력을 가지고 자율권이 있는 실체가 되는 것이다. 이와 같은 구원사적 사고방식은 신앙 진리와 이 진리를 운송해 준다는 관심에 서 차선책으로 나온 것이다. 그러나 이 사고 방식의 문제는 역사 안에 “성경의” 역사상을 넣어 읽음으로써 (inlezen) 여러 면에서 인간 역사로 채워지고 그에 따라 비평의 대상이 되며 또한 구원사가 어떤 유기적 발전 패턴으로 보아진다 는 점이다.(K.Fror, Biblische Hermeneutik Munchen, 1964 P.26). 9. 이제 우리는 19세기 말과 20세기를 걸쳐 살았던 세사람을 살펴 보고자 한 다. 그들은 금세기 해석학과 역사문제를 심각히 다루고 오늘날까지 크게 영향 을 미치는 자들로 (Wilhelm Dilthey (1833-1911), Errnst Troeltsch(1865- 1923).M Kahler (1835/1/6-1912/9/7) 이다. 앞의 둘은 역사 자체의 이성 (Historische rede)을 강조하고 성경 본문의 역사 를 아예 떠나서 “역사 자체 의식” 곧 정신 학문을 객관성으로 보고 탐구함으로가 서 이들로부터 해석학은 성경과는 무관한 별개의 해석학이 되기 시작하였다. 1) 슈라이막허 노선을 따르는 딜타이이로 말미암아 해석학은 보편적이고 철학 적이 되었고 현대 해석학이 여기서 나왔다 하겠다. 현대 해석학은 해석을 위 한 규칙이나 기교의 체제를 찾아내려는 것이 아니고 실존 인간에 대한 해석학인 것이다. 20세기에는 이런 해석학을 M.Heidegger 가 하였다. 틸타이가 활동하였던 시기는 두 가지 면, 곧 자연 과학과 역사학의 제제를 받던 시기다. 자연 과학의 사실들에 대한 지식이 범람하여 인생관과 세계관에 영향을 미쳤다. 이런 자연 과학적 실증주의적이며, 기계론적 관점이 성경 해석학 에 크게 영향을 미쳐, 기적이라든지, 외적인자의 신존재 같은 것은 상상 할 수 없었다. 이럴수록 정신학은 실증주의적 지식과의 독재하에 들어가게 되어 정신학을 포기하게 되는 지경까지 나아갔다. 설사 그 정신학의 객관성이 증명된다. 그 권위가 있다면 타학문에 의뢰하는 데서 생긴 것이다. 게다가 모든 영역에 역사적 지식이 증가하여 성경 해석에 영향을 미쳤다. 이에 따라 엄격한 방법을 사용한 여러 주석책들이 나왔다. 1830-1900년 사이 F.C.Bauer,H.Ewald,A.Kuenen,J.Welhausen,A.Juli-cher등에 이르기까지 새로운 사실들이 홍수같이 쏟아져 나오자 인간들의 신앙을 새로이 정 립해야 지경에 이르게 되었다. 틸타이는 바로 이러한 자연 과학과 역사 학문의 지식을 예리하게 의식한 사람 이었다. 그는 일방적 자연 과학 일색의 지식만을 반대하는 입장이며, 또한 역사는 그 자체 지식을 수립할 수 없어 스스로의 학문이 될 수 없다고 하는 것에 반대하였다. 그는 칸트가 순수 이성을 찾았듯이 역사 자체의 법칙(ratio)을 찾으려고 하였다. (성겅 본문을 떠나서!). 어떻게 역사적 경험이 우리의 학문이 될 수 있을까? 하여 역사 세계의 구조를 찾은 슈라이막허가 했듯이 “이해”다. 이 이해라는 것은 모든 것을 연결하는 인간 본성, 어디서나 작용하는 인간 삶 에 의해 가능하다. 역사의 모든 표현들이 인간의 자아 정신의 표현이다.동일성의 보편적 구조의 기본 근거라고 한다. 이렇게 인간 정신의 구조적 영관을 포괄하는 이 위대한 역사로 인해 역사 법칙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그래서 삶의 모든 표현이 중요하 지만 문학적 표현들이 더욱 그러하다. 하여 틸타이는 자서전에 큰 가치를 부여 한다. 역사란 본질적으로 인간성의 자서전이라서 사실과 서술 진리와 시기(Wahrhei t und Dichtung)가 함게 전진하고 있다. 틸타이로부터 해석학은 인간 자아 지식 을 개진하는 역사 철학이 된 것이다. 여기에 정신 학문의 지식이 가능케 된 것 이다. 그래서 역사의 영역에도 객관적 철학적 결론을 내릴 수 있게 된 것이다. 사실로 이것이 가능한지는 틸타이는 자신의 생시에는 유보하는 것 같다. (H.W.de knijff,Sleutel enslof Ckampen : J.H.kok,P.86 1985) 이제 성경 해석가의 신앙은 하나님이 역사 안에서 행동하셨는지 아니하셨는지 또한 그러한 행동이 일반적 진리성을 가지는 지의 정신 학문에 달려 있게 되었다. 2) 여기에 역사학의 법칙을 확정한 자가 트렐취이다. 트렐취는 슈라이막허 이 후 신앙과 법칙이 말씀과 역사가 서로 제갈길로 가기에 이들을 서로 연결시켜 보려는 노력을 해 보았다. 그에게 분명한 것은 우리는 현대인이라서 과거의 사 실들에 대한 지식을 방법은 고전적 교의학적 방법과는 판이하다는 것이다. 후자의 경우는 역사적 사실의 상관성에서 사실을 분리시켜 사실 위에 절대성으 로 군림케 한다는 것이다. 트랠취의 법칙이라고 할 수 있는 비판, 유비, 상관 관계(말하자면 상대성)는 사 실과 관련되어 있음을 부인할 때는 사실에 있어서 역사적이 되지 못한다는 것 이다. 구원 사실이 역사 다른 것과 비유되며 유추적이며, 상관성을 갖는 다는 것이다. 그렇지 않고 역사 안에 있는 어떤 것이 아니면 그것은 사실과 일어난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성경의 절대적 언표가 어불성설같을 수밖에 없는 것은 성경 안에는 우리의 역사가 기술되어 있고 구원의 역사에 연관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트렐취는 기독교의 절대성을 추구한다는 것은 비극적인 것이라고 하는 것이다. 이렇게 말씀과 역사가 명백하게 구분되고 어떤 인과율적 역사 법칙에 따라 인 생관이 지배될 때 기독교 신앙은 어떻게 되겠는가? 다음 단계는 이러한 내재주 의적 법칙을 벗어나기 위해서 “도덕적 이상””인격성의 소명” 예수의 신의식” 같은 윤리적 종교성으로 나아가게 되는가 하면 “철저한 종말론적 해석” (A.Schweitzer,M.Werier)에서 돌파구를 찾는 것이다. 3) 켈러는 Der Sogennatnte historische Jesus und der geschichtliche Christ us (1892)을 썼는데 그는 역사적 비평 탐구의 예수상은 “과학자들의 열망의 거 울이 되었다. 인간 두뇌와 손의 조작물이 된 것이다” 라고 하고 다른 곳에는 Es ist Zumeist der Hern eigner Geist, in dem Jesus sich spiegelt(E.Wolf) 가 편집한 동상책 Munchen,1936 P.30 이러한 역사 탐구의 결과에서 나올 수 없 는 신앙의 더 확고한 근거를 찾아 학문적 문제성과 불확실성이 없는, 켈러 자신 이 말하는 대로는 “폭풍에서 벗어난 안전지대” (Storm – vrije Zone)로 만든다는 것이 역사적 예수와 초자연적 그리스도를 구분하는 일이었다. 그리하여 역사적 예수는 역사적 학문의 탐구의 대상이 되는 것이고, 역사적 그리스도보다 더한 이가 신앙이 근거하는 그리스도다”고 한 것이다. 이 말은 다시 말하면 예수 그리스도의 역사성이 없이도 신자가 될 수 있지 않은가 하는 문제로 연결되었다. 그 결과 기독교 신앙 진리는 역사성이 없는 비역사적인 것 이 되었다. 이렇게 까지 나아가자 기독인으로서 책임의 한계를 느끼게 되어 다시 학문은 그 요청되는 객관성을 지녀야 한다는 결론에 이르게 되었다. Harnack이 말한 대로 “객관의 순수한 지식”에 머물 때에 우리가 신앙에 대해서 말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또 다시 신앙은 학무에 근거하는 것이 되고 만 것이다. 그러나 역사책이 복음의 진수를 나타낸다고 할 경우 문제는 더 어려워졌다. 그것은 신앙의 비평의 대상에서 벗어난다고 할 때 또 다시 전대에 문제된 학문 에 돌아간다는 어려움도 어려움이지만 막상 그러고 보니 성경의 내용이 탐구자와의 시대적 거리감이 생겨, 본질을 벗겨 보겠다고 하는 탐구자와의 시대적 거리감이 생겨, 본질을 벗겨 보겠다고 하는 탐구자의 기대마저 포기하는 지경으로 나가게 되었기 때문이다 (여기에 양식 비평이며 성경 신학이 발전함). 요컨대 신앙을 학문(역사)에 근거할 수 없다는 것이며, 신앙은 그 자체 현실이기에 학 문을 필요로 하지 않으므로 말씀들에 의해 영향도 손해도 입을 수 없다는 것이 다. 그러면 학문(역사)과 신앙은 어떻게 연결될 수 있으며, 같은 사건 같은 본 문일 때도 그 양자의 구분이 가능한가? 역시 학문의 진리가 있고 신앙의 진리가 있는가? 이러한 문제를 답해 주려고 하는 것이 20세기의 해석 학자들의 노력들이다. 칼바르트의 변증법적 해석학이 그러하고 불트만과 그의 학파들(Emst Fuchs 와 George Gadamer)의 해석학이 그러하다. 또 M.Heidegger와 Hans George Gadamer의 철학적 해석학이 그러하며 소위 구원자적 해석학을 한다는 쿨만(신약),폰라드(구약),판넨베르그의 신학의 시도들이 그러한 것이다. 10. 칼바르트는 그의 초기 시대에는 계시의 모든 것이 역사를 초월해 있다고 주 장하였다. Gadamer가 “해석학의 선언”(hermeneuitisch)이라고 칭한 로마서 주석 (1919) 서언에서 그는 이렇게 쓰고 있다. “나의 해석을 위한 모든 에너지는 역 사를 통해서 또한 넘어서 성경 정신 곧 영원한 정신을 쳐다보려는 노력에 소모 되어 왔다.(Karl Barth,The Epistle to the Romans (London:Oxford University press,1957 P.1) 둘째판에서는 “본문에 기재된 문제는 창조적 근육의 긴장이며 변증법적 방법을 냉혹하고도 탄력성 있게 적용하지 않고는 풀어질 수 없다”고 한다(동상P.8). 바르트에게 있어서 이 변증법적 방법이란 시간과 영원, 본질적으로 하늘에 계 신 하나님과 지상에 있는 인간과의 관계를 두고 부정과 긍정을 하는 긴장으로 이해된다.”그러한 하나님과 그러한 사람과의 관계, 그러한 사람과 그러한 하나님과의 관계가 나에게는 성경의 주제며 철학의 본질이다”(동상 P.17)라고 한다. 따라서 바르트가 말하는 문자 (litera)는 그리스도의 영의 위기하에 오는 다른 영들의 음성이다. 오직 이렇게 하므로써 말씀들 안에 있는 말씀을 드러낼 수 있다고 한다. 바르트의 이와 같은 입장은 종래의 자유주의 입장, 예컨대 Julicher와 Lietzm ann의 역사적 비평의 피상적이라고 비판하고 나온 자기 입장인 것이다. 그는 말하기를 “만약 역사적 비평주의와 축자적 성경 영감 교리 사이에서 하나 를 택하라고 하면 나는 주저없이 후자를 택하겠는데 그것은 후자가 더 넓게. 더 깊고, 더 중요한 정당성을 가졌기 때문이다”(동상P.1)라 하였다. 그런데 바르트 는 영감을 하나님이 전적 타자가 됨으로 오는 범주에서 야기되는 변증법적 긴장으로 이해하고 있다. 선지자, 사도, 복음 전도가 한 오류 있는 말씀 속에서 작 용하는 영원한 정신의 신속함에 내적으로는 응답하는 그러한 해석 방법이라고 한가. 그러니 바르트의 로마서 주석은 사도 바울의 것이라기 보다는 자기 바르 트적인 표현인 것이다. 바울적인 인간론을 다루는 것이 전혀 아니다. 바르트는 자신도 이와 같은 시도는 바울 서신에 대한(on) 주석은 될를지 몰라도 바울의 (with)주석은 아니라고 인정한다. 이러한 로마서 주석을 비롯한 초기 작품들이 나오자 불트만을 비롯한 루터란 학자들의 비판이 거세게 나왔다. 이에 바르트는 이들의 비평의 소리를 듣지 않을 수 없었으며, 여러 현대적 주석가들의 탐구 조명도 참고 이해야만 했다. 그리하여 그의 방대한 “교회 교회학” (Kirchliche Dogmatik I/1.1932,I/2.1938 II/1.1940,III/1.1945,III/2.1948,III/3.1950,III/4.1951,VI/2.1955,VI/3,1. Halfte 1959,VI/3,2. Halfte 1959)이 저술됨에 따라 그의 사상에 변화가 생겼 다는 것이다. 그의 언어 구사나 개념 형성이 초기보다는 훨씬 덜 철학적이 되 었다고 한다. “하나님 말씀”이 “예수 그리스도”라는 말로 대치되고 “변증학” (Dialetiek)이 “역사”(Geschichte) 로 바뀌었다고 한다. 특별히 “교회 교의학”후기에 가면 갈수록 “구속사”(Heilsgeschich-te)라는 말을 즐겨 사용하고 또한 이 말과 함께 “역사”(Geschichte)를 사용하여 자신의 신학을 진술하려고 하였다. 또한 불트만에 반대하여 그리스도의 부활의 사실성을 말하고 그의 종말론을 비판하면서 인간 부르심이 시간 사건 안의 일이라 고 강조하였다 (KD IV/3 1037). 그리고 그리스도의 재림을 “역사적 이면서 또한 시간적 사건”(Ges-chichtliches ens also Zeitliches Ereignis)이라고 하였다. 또한 그의 로마서 주석을 지배하고 있는 하나님 역사와 인간의 역사의 이원론은 후대 작품에 나타나는 전적 긍정과 전적 부정 (opus proprium 과 opus alienum의 변증법과는 관련성이 없다 고 한다. 바르트 연구가들이 대개 이런 논조를 펼 때 C.Trimp 교수는 앞에서 말한 학위 논문에서 과연 바르트의 구원사 개념이 정통주의 입장에 돌아섰는가를 문제를 연구했던 논문에서 우선 바르트가 의미하는 구속사란 하나님의 수직적이며, 주 주권적 행위들을 지칭하는 것이며, 은익된 것이 세상 안으로 새로이 파쇄되는 것, 곧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 계시를 총칭하고 있다고 하였다. 이 구속사 속에는 우리의 시간 개념인 과거, 현재,미래 등이 파쇄되어 인간의 특징적인 시간이 살아 계시는 하나님 시간으로 들어올리워진다(Opheften). 이러한 바르트의 말 속에는 여전히 그의 초기 저서들 속에 있는 인간의 시간과 하나님의 시간의 이원론이 지배하고 있다는 것이다. 바르트의 시학은 초기 변증법적 신학의 주제들을 포기하는 듯하면서 당황하였 던 시대 형편에 비추어 책임 신학이 되려고 하였다. 이러한 입장을 나타내는 저서는 1956년의 Die Menschlichkeit Gottes 이다. 초기 로마서 주석에는 하나님의 부정이 하나님 긍정이 은익이었던 것이, 여기서는 하나님의 긍정이 부정을 내포하고 있다함으로써 하나님 긍정적 면을 더 강조하는 듯하다. 그러나 바로 이러한 순수한 후퇴는 (eine echte Retrakation) 나중에 와서 퇴각하는 것이 결코 아니고 하나의 새로운 상황과 시도에서 앞에서 정당히 말한것을 지금에 와서 더 좋게 말하는 것이다.(동상 책 P22). 이렇게 초기에는 미미한 공리, 진술한 것이 최종에 와서 그 처음 것이 폭팔하 는 전개 방식을 취하는 것이 그의 변증 신학 내용의 특징이라고 Trimp는 말한다.(Trimp.Ibld.P.194). 이렇게 전에 포기되는 듯한 사상들이 더욱 적극성 있게 또한 공공연하게 증명하는데 대해 바르트 자신은 이것을 구속사의 “이중차원” Zwei ldimensionlitat)이라고 하고 또 이것은 기독교 사상의 기본 (Undaten des Christlichen Denkens)에 속한다고 변명한다.(KD.IV.2920). 이러한 사상 발전 과정에서 그의 “구속”관은 가면 갈수록 하나님의 인본주의 (humanisme Gods)방향에서 만인 구원론적 경험을 나타냈다. 즉 하나님의 심판 이 신인간의 관계에서부터 하나님의 절대적 긍정과 하나님의 시간적 부정의 양면성으로 이해된다는 것이다. 우리는 이점에 대하여 G.S.Hendry의 “The Dogmatic Form of Barth’s Theology ” (In Thelogy Today,Princeton NT.XVI 1956/7,308-309) 에서 인용하면: “바르트의 교의학 사상과 초기 저서들의 것과 가장 깊은 차이를 만드는 것을 그리스도의 유일론 (Christocentrism)인데 이것이 그 변증법이 변화된 특징을 결정지워 준다”. 변증 신학이 처음에 나타날 때에는 그 변증법은 키엘케가드적 인 것 즉 신적인 것과 인간적인 것, 영원한 것과 일시적인 것, 무한한 것과 유 한한 것과의 무한한 질적 차이를 말하였던 것으로 로마서 주석의 특징적인 말 들- 전적타자, 진공, 죽음의 선, 위에서부터 오는 직선들의 말 등은 이 기본 주제의 다양성이었다. 그러나 이렇게 되면 신적인 것과 인간적인 것의 “타자성”이란 것은 결국 이 양자간에 전혀 어떠한 관계도 성립될 수 없다는 것이다. 만약 직선이 원에 타촉하듯이 신인간에 타촉한다면 성육 같은 것을 생각할 수도 없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결국 유한한 것이 죄악이라는 결론 밖에는 나오지 않는다. 바르트의 “교의 학”의 그리스도 유일론적 입장은 이러한 모습을 결정적으로 뒤바꾸어 놓았다. 이것은 신적인 것과 인간적인 것과의 타자성을 철폐하지는 않으나 그 타자성 은 긍정도 되고 부정도 되는 성육한 그리스도 안의 실제적 연합의 관점에서 고찰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성육은 신적인 것과 인적인 것과의 본질적 상반성 을 배제하고는 죄 때문에 오는 그들간의 실제적 구분을 드러내 준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은혜는 죄인들의 모순을 극복하는 행위이며 하나님은 이것을 통해 죄인들을 자기와의 교제에로 인도한다. 변증법의 요소가 제거되지 않은 채 그 위치에서 상당한 변화를 가져온 것이다. 그것은 하나님과 세계와의 관계에 있는 변증법이 아니고 영원한 신적 말씀 안 에 긍정과 부정의 내면적 신적 변증법이다. 바르트는 키엘케가드적 변증법에서 다른 것 곧 헤겔적 변증법으로 넘어간다. 헤겔적 변증법이란 절대 정신의 자체 운동의 반을 넘어 합으로 가는데 타자성이 합으로 극복하는 것이다”. Van Til 박사도 같은 맥락으로 말한다. “바르트가 후기 작품에서 자신을 교정하였다.”(Corrected)고 여러 저자들이 지적하였다. 그의 기독교 원리가 그로 하여금 하나님은 역사 안에는 물론 역사 위에 임재해 있음을 보도록 하였다는 것이다. 그러나 바르트의 이와 같은 강조 의 변화가 하나님이 역사 안에 직접적으로 자신을 계시하였다는 생각인가? 이러한 강조는 하나님이 진실로 역사 안에 계시되었으며, 바로 이 계시 안에 하나님이 전적으로 은익되어 있지 않다는 원리인가? 그러한 주장은 증명할 만 한 아무런 증거도 인정되지 못한다고 하는 것이다. (The Triumph of Grace Vol I.1958,P. 97). 바르트에게는 지상의 역사는 오로지 반영 (refletor)으로만 작용한다. 그에게 구원사의 본질적 중요성은 성부 하나님과 성자 하나님 사이에 있는 연합적인 역사 (Geschichte)에 국한되어 있다. 하나님의 절대적 긍정은 하나님의 시간적 부정에 의해 필연적으로 동반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역사적인 사변적 사고에서 기독교적 구원 교리가 바르트에게 정당하게 이해 될 리는 없을 것이다. C. 구속사에 대한 우리의 이해 I. 말씀의 역사 현대 해석학이 복잡하게 얽혀 있는 주제를 우리는 살펴보았거니와 우리는 진리 와 역사가 서로 떼어놓을 수 있는 성격이 아니라. 서로 정당한 의미를 갖기 위 해서도 일치되어야만 한다고 보는 것이다. 역사와 관련없는 말씀을 생각할 수 없고 어떤 결정적 말씀 의미를 강조함이 없이 신구약 역사를 말할 수 없는 것이다 이중 어느 하나를 희생하고 어느 하나를 절대화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런데 변증법적 사고에서는 진리(곧 케리그마)를 찾는다. 하여 역사를 무시하였다. 바르트는 우리의 현실 역사가 아닌 초월 역사 차원을 생각하는가 하면 불트만은 역사가 아닌 실존적 내면성, 순간적 결단을 강조했다. 대개 변증법적 신학에서는 역사를 무시하는 것이다. 반면에 쿨만은 말하기를 하나님의 행동 자체는 역사 안에서 보다도 더 구체적으로 인간에서 나타나는 데가 없다. 역사는 언제나 그 깊은 본질에 따르면, 하나님과 인간과의 관계를 형성한다. 즉 역사(이 경우에는 예수 그리스도의)는 “하나님의 계시 행동들의 모든 (빠짐 없는) 표현이다. 모든 기독교 신학은 가장 깊은 본질에 따르면 성경적 역사이다. 여기에 “하나님은 일상적 의미의 시간 사건들의 일직선 상에서 자신을 계시하신다….여기에 시간과 역사를 떠난 채 하나님을 생각한 여지가 없다”(O.Cullmann,Christus und die Zeit,Die Urchrist liche Zeit und Geschichtouffasung.1962 P.38). 여기서 쿨만은 구원사가 세속사와 같다고 말하지는 않지만, 하나님의 행동들에 의해 때들 (Kairol)에 미치는 특별한 구속사적 순간들을 말하는 것인데, 시간선 에 있는 특별 선택된 점들에서만이 구원사 노선을 구성하려는 하는 것이다. 그 목적은 좋으나 그가 양식 사학적 결과들을 받아들이므로 이 구속사 노선에 간격을 주는 점과, 어찌보면 역사가 계시의 별칭 (de no emer)처럼 주장하는 것 같다는 점이 문제된다. 여기에 우리에게 어려움을 주는 사실은 케리그마를 강조하는 자들이나. 아니면 역사를 강조하는 자들이 이상하게도 서고 배타적인 입장에서 있다는 점이다. 이에 대해, 판넨베르그는 케리그마와 역사를 연결시켜- 지금까지 말한 역사적 상황에서 나왔음을 우리는 보았거니와-” 구속 사건과 역사”의 첫 시작에서 이렇게 말한다. “역사는 기독교 신학을 가장 포괄적으로 집약하는 수평선이다.” 한 눈에 다 들어오는 시야라는 말이다. 모든 신학적인 질문과 대답은 역사의 테두 리 안에서만 의미가 있다. 역사와 무관한 신하은 이미 무의미하다. 이 역사란 하나님과 인류가 공동으로 소유한 것이며, 또 인류를 통하여 신이 자기 모든 피조물과 공동으로 소유한 것이다. 그리고 그 역사는 미래를 향해서 가는 것인 데, 그 미래가 이 세상에는 아직도 가리워져 있으나, 예수 그리스도에게서는 이 미 명백해진 것이다. 이것이 기독교 신학이 전제다”라고 하고 있다. 이런 그의 포괄적인 사상을 입증키 위해 그는 폰 라드의 전승사를 도입하면서 본문 배후의 진리를 찾으려 했으나 거기에서 하나의 구속사도 얻어내지 못하고 단지 보편사를 것을 발견했다. 즉 본문 배후에 있는 것은 한 부분으로서, 사실과 본문이 함께 말하는 것이다. 그래서 해석학이라고 하는 것은 보편사적 관찰의 한 부분이다. 본문과 독자 사이에서 일어나는 빛은 위대한 태양 진로에 있는 조그마한 계기로서 인간사가 파악되는 곳이다. 여기에 Gadamer이 말하는 상호 작용이 관계성이 일어나는데, 이것도 역시 판넨베르그에게는 보편사의 한 부분 이라는 것이다. II. 계시사 (Historia Revelationis)의 구조와 특징 이제 우리의 입장을 밝힐 차례인 것 같다. 오늘날 해석학이나 문제점들을 우리 가 믿는 성경이나 계시사를 아예 포기하고 시작하는 말들이다. 이런 파격적인 해석 태도가 우리의 신앙을 잠식할수록 우리는 우리 신행의 표준인 말씀이 말하는 그 내용(구원사)과 그 계시 역사 구조를 알아 두어야 한다. 우리가 계시사를 연구해야 할 목적은, 현대적 해석학의 도전에 응수하기 위해서는 물론이지만, 우리 자신이 하나님이 자기 말씀 가운데서 자신을 계시하시는 지식을 알기 위해서다. 계시사를 알려고 할 때 벌써 구약과 신약으로 구분되어 있는 그 자체가 성경에는 역사적 구조가 있다는 것을 보여 준다. 구약 자체 의 성격과, 이 구약의 신약과 가지는 관계에서 연구되어야 한다. 이스라엘 백성이 이방 민족 가운데서 선택 받은 것, 율법 받음, 신정국으로서 확립, 예루살렘 성도와 가나안 땅 거주, 바벨론 포로로 인한 이스라엘 민족의 단 절, 그리스도 탄생 이전의 암흑기 등, 각 시대들이 해석학적 의미를 가진다. 이 모든 것을 같은 하나님이 계시하신 것으므로, 계시의 진리를 역사의 옷을 입고 있는 진리이다. 그리고 구약과 신약을 전체적으로 관련시켜 연구해야 한다. 이렇게 성경을 연구할 때 나타나는 사실은 성경에는 진리들이 연속적으로 계시되고 있다는 사실 이다. 즉 다음 것은 앞에 것에 연관되며, 이것이 또한 더 나아가서는 과정에서 구원 약속이 더욱 개진된다. 그러나 구약의 계시 개진은 어디까지나 예비적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시작 단계에서부터 실제로 성취되어 가는 것이다. 요컨대 하나님의 계시 진리를 유기적 성장을 나타내면서 그 역사적 형편을 보여줌으로서 그 진리의 신성함을 나누어 주며 하나님에 대한 지식을 보여 준다. (G.Vos 성경 신학 P.9) 2) 그런고로 사건들- 역사의 전진이 대단히 중요하다. 구약에 이 사건들과 불가 분리의 관계에 있는 주의 말씀들은 그의 한 말씀에 속한다. 구약의 사건들은 (오실) 그리스도 안에서 자신에 대해서 그리고 인간의 대해서 말하고, 어제와 오늘과 미래에 대해서 말씀하시는 하나님 말씀에 의해 만들어지고 지배당하고 인도되고 해석된다. 그리하여 하나님이 자신을 알리는 자아 계시의 점진성으로 인해 계시의 전진이 있는 것이다. 이런 계시사에서 우리는 하나님과, 그의 덕들에 관한 하나님의 계시를 논구하는 바인데, 이렇게 함으로써 인간 존재의 피조성과 타락성, 회개 와 여호와 경외에 대하여 알게 된다. 특별히 하나님 언약의 전지하는 계시 속에 는 역사적으로 여러 가지 독특한 시대들이 있음도 보게 된다. (창3:9:12:17: 출3:19:34: 등 후시대에는 렘31: 등). 3) 우리가 계시 전진을 말할 때에 여러 면에서 역사 진전에 따라 발전적 면을 보여 주는 것을 참고로 한다. 예컨대 언어 개념들의 발전을 살펴야 한다. 언약, 죄, 인애, 영 등 언어 의미를 탐구해야 한다. 오늘날 언어 개념 탐구의 기능성 과 방법론이 많이 제시되는 데 우리는 그 탐구가 어떤 특수한 신학적 전제와 연관됨이 없다고 할 찐대, 그 언어의 의미들이 변천을 보는 것이다. 이 점에 대하 여 James Barr의 The Samantic of Biblical Language (Oxford,1961)를 참고함이 좋다. 그리고 계시사 구분에 계시 수단들이 많이 참조된다. 하나님이 성령으로 말씀 하심, 꿈과 환상 ,상징적 취급,문학 형식의 기능 (시,산문)지혜 문학적 성격 등 이런 구분들은 계시사의 발전이나 전진이라 할 때 이 말은 헤겔 철학적 진화론 적 발전 개념과 다른 것임은 말할 필요도 없다. 4) 하나님의 말씀하심으로 생긴 사실들 – 구약의 세기들을 통해 그 사실들이 진전되어온 그 역사를 우리를 계시사 (Hisoria revelatonis)라고 하며 계시된 역 사 (Historia revelata)또는 성경역사 (Hisoria revelata) 또는 성경 역사 ( Hisoria biblica)라고 한다. 사실상 하나님은 직접적으로, 혹은 인간의 수단을 통하여 자신이 어떤 분이시며, 자기 본질이 무엇인진를 자기 백성에게 알게 한다. 뿐만 아니라 그의 능력과 진노와 심판을 과시한다. 그러나 이것은 자기 은 혜와 사랑을 나타내기 위해 자기 백성을 대항하여 시작하는 것이다. 이러한 계 시는 하나님과 자기 아들과 그리스도 영을 통해 성숙하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전진하는 구원사에 대해서 말살 수 있지만 전진하는 계시사에 대해 말해서는 안 되게 되었다. 우리 시대에 “전진하는 계시” 사상에 반대하여 규정할 필요가 생겼기 때문이다. 보통 말하기를 성경은 하나의 문서로서 이전 세대들이 하나님에 대해서 무엇을 경험하였는지를 확정해 주고 있고, 오늘날 우 리 역시 이웃과 더불어, 세계와 더불어 같은 경험 범주에 속하면서 소위 “깊은 경험”을 한다고 한다. 이것이 구체적으로 사회적 변혁, 정치적 혁명을 치른다고 한다. 소위 이 깊은 경험을 “계시 경험”이라고 한다. 이렇게 될 대에 우리는 계 시사란 말에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또한 우리는 하나님 왕국이 말과 행위 역사 속에 나타나는 분명한 통일성이 있 음을 천명하며, 그 통일성은 유기적 통일성을 의미한다. 그러나 이 “유기적”이 란 말이 마침 꽃봉우리가 활짝 피어나듯이 어떤 생의 법칙처럼 일어난다는 것은 아니다. 하나님의 구원 작용은 계획적이기는 하나 그렇다고 해서 기계적으로 척척 이루어지는 그런 것은 아니다. 하나님과 언약의 백성 사이에는 불가능을 가능케 하며, 초인적 구원 작용이 역 사하며 태양이 어두워지고, 땅이 갈라지고 바위가 깨어지고 무덤이 열리는 하나 님의 손이 있다. 우리가 구원사의 통일성을 말한다면 역사의 모든 계시들이 자기 구원 계획을 실행하시는, 같은 하나님에 의해 만들어진다는 사실이다. 더욱이 이 통일성을 예수 그리스도의 생과 죽음의 과정속에 수렴시켜 놓았다는 점이다. 다윗의 보좌, 성부의 오른편에 있는(엡1:10, 20) 그리스도 안에 구원 사의 통일이 있다. 또한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명을 위임받았다.(행2:33-36). 이 성령을 통해서 이 세상의 길 따라 역사하고, 인간의 시대를 통해 그의 영광스러운 출연의 날, 구원 사가 완성될 때까지 역사한다. 그런고로 구원사의 통일성은 종말론적 사건이다. 수없이 많은 어떤 때는 종잡을 수 없는 사건들이지만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규제 되는 역사의 목적 지점에로 지향하고 있다. 그러므로 구원사의 통일성은 우리 인간의 이해나 컴퓨터 계산에 의해 기록될 성격이 아니라, 오로지 구원사의 조명은 삼위일체 하나님의 고백 안에서 찾아진다. 이런 의미에서 사도적 신앙 고백은 구원사의 파노라마를 어김없이 펼쳐 놓고 있는 것이다. 계시사가 하나님이 자기 백성 또는 원수에게 자기 자신을 알게 하려는 것이라 면, 이 하나님이 자신을 계시하시는 면을 인간과의 관계 방도에서 자기 구원을 보내시는 사실을 강조할 때 이것을 “언약사”라고 한다. 여기에는 신앙과 불신앙, 사랑과 사랑의 배신, 희망과 절망의 역사를 보게 되며, 시험, 의심, 유혹, 감사치 않음,좁은 소견, 우매, 자기 지혜, 하나님 계명에 반대하는 죄악들이 나타난다. 그러나 이것만이 전부가 아니라 이 비참한 장애들 을 극복하는 길을 보여 준다. 하나님이 모든 우여 곡절, 인간 사회의 굴곡의 불 신앙에서도 자기 백성을 그 목적대로유지, 지향하고 있음을 보게 된다. 우리가 구원사를 언약사로 볼 때에 언약을 강조함으로 구원사 속에 있는 인간을 간과하지는 않는다. 구원사에 인간을 간과할 때에는 구원을 객관화시켜 버리 는 결과가 된다. 인간 역사의 구체적인 것에서 벗어나서 하나님이 찬양을 받으 시는 분은 아니다. 구속사에서 우리는 많은 사실들을 말하게 된다. 사실 없는 역사가 없다. 그러므로 우리는 사실들을 추상적 개념으로 만들어서는 안된다. 사실 그 자체 소위 순수 사실을 존재하지 않는다. 사실이 하나님으로부터 유리된 채 존재하지 않는 다. 하나님은 사실에 안에서 행동하며, 사실을 설정한다. 또한 사실을 인간으로 부터 유리시킬 수 없다. 인간과의 교섭에서 하나님의 행동을 말한다. 구속사에 는 인간존재의 복잡성에 하나님 자신이 개입하셔서 끝없는 인간의 이성 작용에 맞서서 그것이 어떠한 형태의 우상 숭배, 형상 숭배나 주의가 되 못하도록 하여 주의 봉사에 헌신하도록 한다. 하나님 자신이 주의 백성의 하나님이라 일컬음 받기를 부끄러워 하지 않고 (히11:16) 높고 높으신 분, 영원히 좌정하신 분, 그 이름이 거룩하다. 하는 자 가 인간계에 내려 오셔서 자기 백성과 함께 거주하신다.(히11:16). 그리고 의 인을 위해서 한성을 예비하시는 분이다. 이렇게 하나님과 인간과의 관계에 대한 이야기 만큼 구원사를 근원적으로 설명해 주는 것도 없다. III. 유형론과 구속사 이 성경 계시사에 대한 연구는 19세기 말엽에 이미 화란에서 H.Bavink나A.Kuyper에의해시대적으로 생소한 시기에 상당한 관심이 표명되었다. 이들의 계시사에 대한 연구는 (1)성경 안에 언급된 사실들의 역사성을 부인하는 성경 비평에 반대하기 위해서와 (2) 전래해 오던교의학이 성경이 마치 “해설집” (bewijsplaastsen magazijn)같이 기계론적 – 자동적인 것으로 취급하는데 반대해서이고 (3) 성경이 종교적 개인 경건의 문서이며, 그것으로서만 단지 권위를 가진 것으로 보는 윤리적 성경관에 반대해서이다. 요컨대 개혁주의자들이 바르게 본 것은 “계시사”를 다룸으로서만 자유주의에 반대하는 소박한 근본주의적 항거에 대해서도 방어할 수 있다는 점이었다. 이런 면에서 위의 두 개혁자 외에도 성경 주석가들이나 설교가들었던 J.Von Andel, G.Doekes, J.C.Sikkel, T.Hoekstr들도 있었다.(F.W.Gresheide, Heilshist orische exegese in GTT 46(1946) 69 보라). 그런데 1930년 이후부터 구약 계시의 성경에 대한 새로운 인식이 생김과 동시 에 구약 계시에 대한 새로운 조명이 나타났다. 여기서 우리는 유형론(Typology) 과 관련시켜 살펴보겠다. 가) 구약 본문을 정직하게 관찰하는 자라면 구약 이야기는 미래 지향적인 충동 (voorwaartse drang)을 갖고 있음을 감지하게 된다. 하나님은 언제나 자기 백성 이 자기 약속을 신회하도록 권유하고 있으며, 약속들은 성취되기를 요청하고 있 으며, 백성들은 미래에 대해서는 많은 것을 기대한다. 이러한 하나님의 인도하시는 성향으로 인하여 이스라엘 백성은 역사적인 것 이외에 달리 그 무엇을 생각할 수도 없게 된다. 과거는 하나님에 대해서 말씀하고 있으며 미래는 그에 대해서 말할 것이다. 나) 하나님 약속들의 성취는 어떤 “차원들”(dimensies) 이라고 하는 “심층화” (verdiepingen)를 보여 준다. 쉽게 말하면 성취되었다고 생각하면 아지고 성취 되지 않은 그런 면이다. 이스라엘 민족은 광야를 여행할 때, 역사의 수평 안에서 시대 따라 계속 진행 하면서, 미래를 지향하는 긴장 가운데서 살았다. 역사를 따라 성취가 이루어지면 그 성취는 다시 새로운 대망의 근거가 되는 것이다. 하나님의 약속의 핵심은 언제나 예언이다. “나는 너희 하나님이 될 것이고 너는 나에게 한 백성이 될 것이다. 그래서 나는 너로 세상의 복이 되게 하겠다”고 하는 족장들에게 한 이 약속은 완전히 성취되지 않은 채 가나안 진입으로 깊어진다. 아직도 미불금이 남이 있듯이 한 부분의 성취가 남아 있다. 히4:9이 “남아 있다.”고 함으로써 “안식”의 약속에 계속되는 층계 가 있다. 일곱째 날 숨, 가나안 진입, 그 다음 시 95편에서 다윗은 신약 교회를 가르치고 있으며, 우리에게도 아직도 먼 훗날 다른 안식이 남아 있다. 이와 같은 식으로 “씨”와 “땅”에 대해서 우리는 살펴볼 수 있다. 하나님이 역사 안에서, 역사를 통해서 말씀하신다고 해서 하나님의 백성이 한 시대에 매여 하나의 정한 사건에 정지되는 것이 아니라, 앞으로 계속 지향한다. 지금의 교회 안에서도 계속 그런 형편이다. 많은 것이 그리스도 안에서 성취되었지만 아직도 미래 완성을 향한 충동이 남아 있다. 마침 망원경의 초점이 맞추어지듯 하면 더 엷고 깊은 조망이 앞에 있는 것이다. 카이퍼는 이것을 구약 역사의 “조망적 통일성이며 깊음”(“cioramarische eenh eid en diepte”) 이라고 했다.(Encycolopaedie der heilige godgeleerdheid, Ansterdam 1984,III P.P 104-105). 다) 이와 관련해서 우리는 “유형론”에 대해서 생각해야 한다. 유형론이 무엇이 며, 그 원리가 어떠한가에 대해서는 D.L. Baker 의 Two Testments,one Bible, (Intervasity press, 1976 P.P 239-270)에서 잘 밝히고 있다. 그는 유형론의 의미가 아닌 것은 주석도, 예언도, 풍유도, 상징도, 체계도, 아니라고 한다.(258-260). 그리고 유형론이 하나님의 계획이라든지, 특별한 한계를 가진다든지, 그리스도와 구속에만 관련한다든지 유형에서 반대형(antiype)으로 나아가는 미래적이며, 전진적인 전조형(prefiguration)이라는 생각들도 아니라고 한다. 그렇다고 해서 유형론이 환상적인 해석이나 로마 카토릭적 “더 풍성한 의미” (fullermeaning)를 뜻하는 것도 아니라고 한다. 그럼 무엇이냐 할 때 무엇보다 유형론은 역사적이라는 것이다. 풍유(allegory) 가 수직적인면에서 생각하여 위에만 순수한 존재가 있고 밑에는 단지 순수한 존재의 그림자만 있다고 하는 것이라면, 유형론은 이와 반대로 역사를 절대적으로 신중히 고려한다. 유형론적 사고는 구체적 사상 위에 있는 역사의 수평적 노선 에 따라 움직인다. 하나님이 이 세상의 역사 안에 특히 자기 택한 백성의 역사 속에 부지런히 역사함을 확신한다. 따라서 이 역사의 흐름 안에 있는 사건들은 일관성 있는 패턴을 따르므로 해서 한 사건이 다른 또는 많은 다른 것의 유형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둘째로는, 유형론에 전대와 후대에 오는 기관들, 인물들, 사건들 사이에 유비 와 (analogy) 실제적 상응점 (a real correspondence)이 있다는 점이다. 물론 상세한 점에 까지 병행점이 있다는 것이 아니라 근본적인 원리들과 구조적 일치점에 가지 병행점이 있다는 것이 아니라 근본적 원리들과 구조적 일치점이 있다 는 것이다. 구약학자 폰 라드는 이러한 유비가 구약 안에서는 역사의 시작과 종말 서술에 서 발견된다고 했다고, 이사야 11장은 낙원이 어떻게 회복될 것인지를 이상적 미래상으로 서술한다. 아모스 9:1은 미래 왕인 다윗 왕이 일어날 것을 보여 준다. 바벨론에서의 귀환이 애굽과 가나안 사이에 이스라엘 여정에서부터 나오는 말들과 상으로 서술되고 있다.(사52:11,12). 새 예루살렘은 고대 예루살렘의 행진을 나타내며, 출애굽은 바벨론에서부터의 구속의 모델이 되고 있다.(렘16:14,15:23:7,8: 호2:14). 그리고 여호와의 새로 운, 아직도 알려지지 않은 구속 사업이 이와 같은 유형론적 방식에 따라 고대 에 알려진 전형으로 서술되고 있다. 이럴 경우 고대 사건들은 새로운 미래 사건의 “유형”(Type)또는 모델 또는 형태(foom)라고 할 수 있다. 유형론에 전대와 후대간의 상응점 또는 유비가 있다고 해서 역사의 과정이 하나의 원과 비유된다는 의미는 아니다. 원상에 있는 사실이 다시 되돌아와서 모 든 것이 새롭게 일어나는 순환적 사고는 아니다. 이런 사상은 이교적인 것이다. 유형론은 다시 돌이킬 수 없는 전진 가운데서 나온다. 전대의 사건들과 후대의 사건들 사이에는 현세적 (taemporele)관계가 있으나, 후대의 것이 전대 사건의 정확한 복사판은 아니다. 그러니 유비는 똑같다 (identification)는 뜻이 아니며, 첫째와 둘째 사이에 점진성이 있으며, 규칙적으로 강세형 (steigerung)을 나타내고 있다. 고대의 것 이 미래에 재 언급됨과 동시에 능가하고 있다. 이런 의미로 구약은 신약에 대해 (튜포스) 또는 전조형 (praefiguratie)인 것이다. 하나님과 인간의 활동들이 일어나는 사건들의 복합성들이 유형적이라고 할 때 우리는 그 처음 것에서 보다 더 큰 복합성을 보는 것이다. 이런 규칙은 구약을 읽고 이해하는 데 대단히 중 요한 의미를 가진다. 유형론적 관계가 구약 자체 안에 있다고 할 때에(예컨대 출애굽-바벨론에서 의 귀환). 구약 전체의 이 관계는 그리스도의 사역과 새 언약의 관점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것이다. 개혁주의 성경관을 가진자는 이와 같은 관점을 출발점을 삼고 있지만, 성경의 통일성을 믿지 않는 자는 성경에 대한 이러한 견해를 갖기 가 쉽지 않다. 단지 신약 성경 저자가 고대 이야기들을 사용해서 이 이야기를 자신들에게 맞게 해석하였다고 하는 것이다. 그러나 성경의 통일성과 성경 저자 의 단일성을 믿는 자는 다르게 말한다. 즉 역사의 창조자며, 성경 저자이신 하 나님이 전대의 언어를 갖고 사건들 쓰되 새 언약의 “마지막 날”을 보고 썼다는 것이다. 신약 해석자는 고대 이야기에 어떤 가치를 덧붙이는 것이 아니고, 있는 가치를 자세히 설명해 내는 것이다. 이스라엘 백성을 인도하고 움직이고 형성하고 끌어내리고 다시 올리시는 것은 하나님 말씀이다. 하나님 말씀이 이스라엘 역사를 형성하는 힘이다. 하나님이 자기 일을 이스라엘 안에서 행사하시고 그 백성을 미래로 인도하고 있다. 이것이야말로 구원사의 추진력이요, 능력인 것이다. 이 역사 형성력의 하나님 말씀은 그리스도 안에서 완성된다.(요1 14:히1:12). 그리스도 안에서 자신을 계시하신 그 같은 하나님이 구약 백성의 역사 속에서도 그 씨를 심어 두었기에 구약의 사실들 속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지향하는 역사적 다이나믹한 힘을 보게 된다. 한 하나님의 계획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전대와 후대의 사업간에는 구조적인 유추가 있다. 구약에는 단편적이고, 예비적인 것이 신약에서 장성한다. 약속된 것이 성취되는 것이다. 약혼된 것이 결혼으로 이르는 것처럼 그림자 현상이 사실 화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구약 이야기를 해석함에 있어서 본문이 나온 전후 환경이나 시대에 비추어서만 해석하는 것으로 만족하지 않는다. 우리는 그 본문을 미래 지향적(nearvoren toe)으로 설명해야 한다. 이것이 성경 자체의 성격이다. 6) 신약에서도 1930년대에 이 유형론 문제를 다루었는데 특히 1939년에 Goppelt 가 알랑겐 대학에서 학위 논문 “Typos:Die typologische Deutung des Alten Te staments in Neuen” 썼는데 이 책이 많은 영향을 미쳤다. 그리하여 1939년에는 “바울에 있는 묵시주의와 유형론”을 첨부시켜 재판된 것이 1982년에는 D.M.Mad ving에 의해 영역되었다. 곱펠트의 생각은 대략 다음과 같다. 가) 곱펠트는 “튜포스”란 말을 기구 또는 결과로서 형식을 지칭한다고 한다. 이 “형식”이란 말은 스타일, 모델, 인상, 본, 흔적, 모범을 뜻한다. 신약에는 모범의 뜻으로 롬6:17:빌3:17:5, 살전1:7, 살후3:9, 딤전4 12, 딛 2:7, 벧전 5:3에서 사용되었다. 나) 이 튜포스는 한 사건이 후대 사건의 모형 (een beeld-von-raf)이 된다는 뜻 에서 사용된다. 곱펠트는 고전 10장 (6절과 11절)의 예를 든다. 바울 사도는 현 재의 형편에서부터 전대의 것을 본다. 고린도 교회가 당면한 먹고 마시는 것에 관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교회 과거에서부터 정보를 얻는다. 광야 고대사건 들을 들어 설명했으므로 독자들은 고대 이야기를 발견해 내는 데 별로 어려움이 없다. 그리스도가 그때에도 역시 있었고 세례와 성찬도 본질적으로 있었다는 것이다. 반석이며 홍해 건넜던 일이며, 만나가 그러하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구약 사건들과 현재 교회의 형편은 서로 유비(analogie)관계에 있다는 것이다. 물론 외적 환경의 일치가 있다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행위에서와 하나님의 시야에 있어서 본질적으로 같다는 것이다. 다) 동시에 사도 바울은 과거와 현재간에 차이가 있다고 하나. 11절에 “말세를 만난 우리의 경계로 기록하였으나” 하나님이 오래 전에 계획하셨던 바가 실현된 것이 지금 이 시대다. 그러니 우리의 책임이 더 크다고 한다. 라) 결론적으로 말해서 전대의 사건들에서부터 하나님은 성경 세대의 후대 결정 적 사역의 윤곽을 발견할 수 있는 구조를 보여 준다는 것이다.”튜포스”란 말이 사용되지 않는 곳에서도 그런 모형적 의미를 가진다. 이삭과 이스라엘 출생과 사라와 하갈의 압력 (롬9:7-9,갈4:21-31), 야곱과 에서의 출생 (롬9:10:13),모 세와 바로와의 조우 (롬9:17,18) 같은 것이며, 사도 바울이 3차 선교 여행에서 발견한 실제적 형편은 고대이야기에서 그 결정적 정보를 발견한 것이다. 이점에서 갈3:8의 사도 바울의 말은 더욱 강하다. 하나님은 언제나 이방인이 믿음으로 의롭게 되도록 하는 계획을 세워 두셨으므로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복음을 전파하여 가라사대 “모든 열국이 너로 인해 복을 얻를 것이리여”고 한 것이다. 여기 더 강하게 나타나는 것은 성경이 미리 보고 아브라함에게 말했다. 함으로써 성경과 하나님이 바로 동일시되고 있다. 하나님이 성경 안에서 상관하 여 거기서 말씀함으로 거기서 우리는 하나님을 만난다. 역사의 통일성과 성경의 통일성이 하나님의 계획 안에 있는 것이다. 이런 사상이 바로 유형론의 근본적인 기초가 된다. 마) 곱펠트가 하나 더 지적하는 것은 신앙의 유형론적 말씀은 선지자적 종말론 에서 나타난다는 것이다. 여기서 언제나 구원 시대가 전대의 구원을 갱신해서 능가하고 있다는 점이다.(사43:3-18,19 44:65 45:10-21) 라든지 “성전보다도 더 큰 이가 여기 있다”(마12:6)고 하는 것이다. 7) 지금까지 말한 것을 볼 때 유형론이 성경 연구에 있어서 그 정당한 위치를 차 지하고 있다. 지난날 성경 연구에서 보면 다음과 같은 것들이 그 대표적인 예들 이었다. – 떠오른 도끼(왕하6:6)는 십자가 형틀을 나타낸다. – 모세의 들어올린 손은 (출17:115)십자가 상에서 그리스도와 양팔 벌린 손을 뜻한다. – 아론이 호르산에 오른 것은 (민20:22) 골고다에 죽으려 올라가신 그리스도의 그림자이다. – 다윗이 예루살렘에서 기드온으로 도피한 것은 (삼하16:23) 겟세마네로 가신 그리스도를 나타낸다. – 여리고에서의 라합의 붉은 줄은 (수2:18) 그리스도의 구원하는 피를 상징한다. 이로 보건대 유형은 전기적 면에서 상세하거나 외적 환경이 우연적으로 일치한 데서 찾아지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사역하시고 인간이 역할을 하는 사실들과 사건들의 총체적 복합성에서 찾아지고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구약이야기에서 삼위일체 하나님이 그 사역하시는 분은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하나님이시다. 이런 내용에서 모든 구약 사건들이 서 있는 것이다. 그리고 성경이 우리에게 이 사실들을 서술하는 방식으로 이야기해 주시는 분은 성령이시다. 그런고로 이 모든 이야기들이 예수 그리스도와 신약 교회에 소망적으로 관련되고 있다. 전대의 사건은 “유형적 야웨”(Eypysch Jahwe)라고 하는 하나님의 사역 들을 계시한다. 그는 자신을 부인하지 않으시며, 자신을 반복하시지도 않으신다. 오직 마지막 날에 자신의 전대의 일을 능가시키시며, 그는 아들과 성령으로 말미암아 자기 간섭을 강세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유형론적 해석이 예수 그리스도에게로 수렵되어가는 하나님의 사역이라는 의미에서 구속사적 의미를 가지 되 일상 생활의 세부 사실들에게 같은 모형을 찾는다는 것과는 다른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지나친 유형론은 삼가야 한다. 이 모든 것에서 볼 수 있듯이 하나님은 변함없는 신뢰 가운데서 자기 백성을 찾고 있는 것이다. 구속사적 설교는 하나님의 사역에 대한 이 넓은 문맥에 대한 존경을 기초하고 있다. 구속사적으로 설교하는 자는 자신의 본문 해석 자체가 그리스도와 성경으로 지향하고 있으므로 고대의 하나님 일과 경륜이 기초가 되 고 완성되어가는 것임을 알게 된다. 8) 구약에 있는 이스라엘의 기나긴 역사는 해석학을 수행해 왔다. 영적 지도자 들, 역사 기술자들, 선지자들 제사장들, 오늘날 신학들이라고 할 수 있는 그 들이 “해석학”을 수행하였다. 고대 이스라엘이나 초기 기독교 교회의 활동으로 신구약 성경이 기원되었고, 어떤 면에서는 우리가 “계시사”라고 하는 많은 부분 이 이 해석학 활동의 결과라고 보아진다. 앞에서 계시되고 기록된 것은 후대에 설명하는 것이다. 이렇게 해석함으로 말미암아 계시사가 발전 성장해 온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우리가 믿는 바는 폰 라드 학파에서 말하는 전승사 개념과는 다른 것이다. 궁켈에서 확립된 양식학파 에서 한걸음 더 나아가 그 원천들의 배후를 더듬어서 그 양식이 어떻게 전래되 며 고대 이스라엘의 이웃(Umwelt)의 친근한 전승들을 살피는 것을 전승사라고 하는데 Martin Noth 와 G,von Rad가 있고 이 방법의 결과로 나온 주석이나 시편 책들이 그렇다). 폰 라드는 이 전승사 개념들이 더욱 발전되어 서로 채워지고 변천하는 역사 가 운데서 이스라엘 신앙과 결탁하게 되었다고 한다. 그 가장 오래된 신앙고백의 핵심은 신26:5-9 인데 이 전승 내용이 이스라엘 안에서 항상 새롭게 신앙, 케리 그마와 신학의 대상이 되었다는 것이다. 사람들은 오래 전부터 전래해 오는 것 을 “엿듣고”(luistern) 이것을 형편에 마추어 새롭게 재해석, 재현실화하였다는 것이다. 이렇게 됨으로써 전승들이 눈덩이리처럼 커가는 것이다. 제이 바티칸 문서에 나타나는 로마 카톨릭의 “전통”(trulition)도 이렇게 커간다고 함은 그 들이 이 전승사를 용납함이다. 그러니 우리의 계시사적 입장의 성경 해석학은 계시사가 해석함으로 인해 성장되어 온 것은 인정하지만, 이로 인하여 정경의 한계를 퇴조시키거나 말소시키는 일은 없다는 것이다. 9) 구속사와 교회사의 관계 문제 정경에 알려진 바의 구속 역사(historiasalutis)와 교회사와의 관계는 어떠한 가? 연구 분야의 한계를 설정하는 문제이지만 사실 구속 역사와 교회사간의 정체 구분을 획선을 그어서 정해 놓은 것은 없다. 그렇다면 교회사의 사건들이 구원사의 사실과 같은 평면 위에 설 수 없을까? 하는 문제가 오늘날 교회에 상당 한 문제를 야기시키는 진원이 되고 있는 것 같다. 그러나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신약은 어떤 교회사를 기술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교회사의 기초를 정초하고 있다 하겠다. 십자가의 죽으심과 사심에 초점을 둔 구원사 사실이 이방 백성들의 영역과 가슴에 파고들고 있다. 죄인들을 위한 우주적 복음인 동시에 죄인들은 하나님 왕국에 상관이 없다고 하는 양면성을 다 하나의 역사적 구조적에서 고려할 대 의미가 풍성해진다. 바울 역시 유대, 헬라 로마 배경을 단절, 혹은 섭최하면서 복음 진리를 나타내는 것이지 율법과 복음 이라는 변증법적 추상적 진리를 나타내는 것은 아니다. 그렇다면 교회사의 사도 이 사실을 수용하지 않는가? 이점에 J.Kamphuis 교수 의견을 들어 보면 다음과 같다. 가) 구속 사건들의 위치들은 다른 교회사의 사건들과 마찬가지로 같은 평면 위 에 있다. 말씀이 육신이 되었기 때문이다.(요1:14). 구원 사건들이 오늘날 우리가 알고 있는 역사들 즉, 우리의 옥중 성도들이 기 도한 뜻에서 고신 대학이 세워졌다든지,혹은 니케아 회의가 일어났던 세계와 같은 역사 속에서, 그것이 일어나지 않았다면 그 구원 사건들은 오늘날 우리와 아무런 실제적 관계가 없다.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획득된 구원은 그의 성령으로 말미암아, 교회사를 통해 전수되고 있으며, 오늘날 교회사 역시 하나님 구원 역사속에 속한다. 나) 그처럼 역사의 통일성을 인정한다고 해서 역사 내의 구분을 고려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역사서의 통일성(oneness)은 성경 신학과 교회론이 다 같은 신학에 속한다는 것이 될 것이며, 한 역사 내에서 구분한다면 신학 내의 분과별 제도의 구분을 가능케 하며 필요하게 한다. 다) 역사의 통일성 안에 확실한 구별이 있다. 성경에서는 하나님의 뜻과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이루어진 구원에 대해 권위 있는 계시가 주어졌으므로 닫혀진 정 경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반면에 교회사의 어느 시기도 이런 계시적 성격을 띤 것은 없다. 비록 믿는 자에게 주께서 그의 섭리와 은혜의 역사에게 계시하시 기는 해도 언제나 이런 것은 이미 성경에 계시된 것에 의해 결정된다. 라) 하나님의 계시가 신빙성 있는 계시이며, 이 계시에 의해 사람은 위임된 사 명을 수행한다. 교회사는 하나의 분야로서 이 원천에서부터 비평을 받는다. 마) 교회사 연구와 기술은 원천적 비평을 받을 뿐만 아니라 미래 모든 역사에 대해 비평,판단할 목적이 있다. 교회사의 모든 사건은 성경 정경의 권위아래 있다. 이는 교회가 교회되게 하는 하나님의 말씀의 상대화를 허용치 않는다는 것이다. 신앙 고백적인 교회사 서술은 계시된 성경 교리와 교회가 받아진 것과 일치되어야 한다. 이 정경적 귄위는 어떤 역사의 형편에서도 변할 수 있다. 이 정경적 권위는 어떠한 역사의 형편에서도 변할 수 있다. 그러나 교회사의 어 떤 것이든 절대화하는 것-교황 제도, 성경과 전통을 동일 선상에 두는 것 등은 역사 비평에 의해 제거 되어야만 한다. 콘스탄틴 대제가 동로마로 갈 때 서로마를 로마 감독(교황)에게 희사하였다는 콘스탄틴 희사는 이태리 인문주의자 Lore nzo Valla의 본문 비평에 의해 위조로 판명되었다. 이런 뜻에서 보면 “기술된 것은 일어난 것이다”라는 논리는 재고할 필요가 있다. 예컨대 과거에 진리의 소리를 발하다가 로마 카톨릭의 종교 재판의 단두대 에서 이단으로 사라져간 많은 dissents들, 그들의 기록은 불태워지고 남은 것이 라고는 그들을 처형한 원수(?)들의 입장에서 기술된 몇몇 정죄 귀절들만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보다 더 넓은 역사적 안목에서 조명해야 할 것이다. 이런 역사 비판에서 우리는 개혁주의적 역사관을 확립해야 한다. 바)성경은 그리스도 안에서의 하나님의 일과 이 세상에서 그 일의 역사에 대해 서 권위 있게 말씀한다. 이 하나님의 일을 교회사 기술의 출발점으로 인정하는 이 자체가 이 세상 역사 진전에 동일한 하나님이 적용하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다. 그런데 교회사의 관심은 이 하나님의 말씀을 위해서 혹은 거역해서 사람들이 어떻게 응답하였는지를 기술하는 학문이다. K.Schilder의 구분에 따라 말하면 그리스도가 모이게 하는 회중(Conqeeatio)은 다른 면에서 보면 믿는 자들의 모임(Coetus)인 것이다. 교회사에서는 이 믿는 자의 모임(Coetus), 곧 우리 인간의 탐구해 가는 대상을 다루는 것이다. 그러니 교회사는 엄밀한 의미에서 신학(신에 대한 학문)은 아닌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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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속사적 성경 해석 A. 정의와 관계된 문제점 성경 본문을 바르게 읽는 자라면 성경에서 구속사를 회피할 수 없다. 그것은 성경이 만들어진 자체 과정이 이 구속사 사상을 유지하려는 데서 이루어졌기 때 문이다. 이 구속사가 어떻게 정의되든 구속사는 우리가 단순히 믿는 대로 삼위 일체 하나님이 인간을 위해 하신 모든 신적 행동을 총체하는 개념으로 특히 예 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하나님께서 성도의 공동체 생활을 하는 자기 백성에 대한 자기 계획을 실현하는 역사적 사실들의 총체를 의미한다. 이중에서 특히 예수 그리스도의 나심, 수난, 죽으심, 부활, 승천이 핵심이 되고 있다. 하나님께서 여러 선지, 여러 직분 등 계시 기관을 통해 성령으로 증거 하였으니 후대인들은 이 하나님의 계시와 사건들에 기초를 두고 믿음과 지식을 가지는 것이다. 이러한 역사적 사건들이 종말을 향한 직선적 시간 속에 여려 모양 방법으로 다 양성을 갖고 나타난다. 구약의 약속인 신약에서 성초되어졌듯이 동일한 말씀이 미래의 약속과 구속이 또한 그대로 이루어질 것으로 믿는다. 이러한 구속사에는 통일성과 함게 다양성이 있다. 구속사에 대한 성경을 믿는 자는 반대할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오늘날 현대 교회를 어지럽게 하는 것은 성경 해석학의 문제다. 과거 한국 교회가 여러 분파로 갈라서게 된 이유 중 근본적인 것 하나가 바로 성경해석문제였다. 또 이와 관련해서 우리가 성경 해석학의 문제를 생각하면서 구원사적 성경 해석 문제를 거론한다는 것은 큰 의의가 있다. 우리 시대가 처해 있는 신학적 혼란기 역시 성경 해석학의 문제에서 비록된 것이다. 이런 때의 우리 교회가 지향하는 방향이 무엇이냐를 음미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다행히 최근들어 우리 교회는 “구속사적 성경 해석”에 대한 지대한 관심을 갖게 되었다. 과연 이것이 우리의 해석 원리가 될 수 있을 것인가? 그런데 오늘날 해석학계에 “구속사”라는 말이 혼돈을 야기시키고 있다. 그것은 개혁주의자들만 이 아니라, 자유주의 신학자들도 구속사라는 말을 대단히 즐겨쓰고 있기 때문이다. 교의신학자 K.Barth,W.Pannennberg,신약학자 R. Bultmann, O. Cullmann은 물론 구약 학자 von Rad등이 즐겨 쓰는가 하면 심지어 교회사 학문에서도 구원사 교회사의 시대 구분을 지우는 것이 무엇이며, 정경의 구원론이 현재까지도 계속 되지 않는가 하는 문제에서 심각히 토론되고 있는 주제이기도 하다. 신교학자 들 뿐만 아니라 로마 카도릭 학자들도(K.Rah-ner)등 구속사를 심각하게 다룬다. 그리고 오늘날 신구교를 막론하고 엄습하고 있는 현재 여기서의 경험을 계시로 강조하는 신학들도 나름대로 구속사를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이 말의 사용의 빈번도와 선호와는 반대로 학자마다 구속사의 일관성 있는 분명한 의미를 보여 주지 않은 데 있는 것이다. 지금으로부터 반세기 전에 G.Weth가 이미 “구원사는 오늘날 많이 논쟁되는 말이다….. 이 개념은 의미와 취급은 곧 우리 현대 신학의 일반적 동요와 분열의 거울상이 된다. (Die Heilsgeschihte lhruniverse-ller und individueller Sinn in der offenbarungsges chichtlichen Theologie des 19 Jahrhunderts,(Munchen,1931, P.2) 하엿는데 이 말은 오늘날도 구대로 적용될 수 있다. 1959년에 와서는 이 말이 가져다 주는 불분명서이 더 이상 계속되지 않게 하기 위해서라도 신학 사 전에서 “구속사”란 말을 아예 제거해야 한다는 논문이 나왔는데 그것이 바로 K.G,Steck 가 쓴 “Die ldee derHeilsgeschichte”(in Theologische Studien, Heft 56 Rollikon, 1959)였다. Steck는 이 논문에서 J.C.H.K.V.Hofmann, A.Schlatter, O.Cullmann의 구원사 신학 개념을 개관하고서는 구원사의 말을 선호하려 하는 동기들에 대해 가치 있는 관찰을 하였던 것이다. “그런고로 구원사적 -요소들은 기독교 진리를 순전 히 사변적으로, 순전히 인간론적 -실존 철학적으로 전개하려는 시도들을 제지하는 것을 도와 주어야만 한다….기독교 지식의 열쇠로서 구원사 사상은 종교 개혁과 정통주의 교리 사상을 혐오하는 데서 자라오고, 또한 개혁 추구와 함게 가장 현대화하는 방편으로 더욱 신비적 기독교 이해를 하는 것이다”(동상 P.12) 라한다. 그리고 스테크는 쿨만이 구원사라는 열쇠를 갖고 고대 교회를 보았던 것에 대해 그것은 그리스도의 승천과 재림간의 구원사적 긴장을 생략해 버리는 듯한 키엘켈가드적인 “동시성”(Gleichzei-tigkeit)사상에 반대하여 또한 교회 시대를 아예 중간시대로 강조하는 로마 카톨릭주의에 반대하여 (Cullmann, Christus und die Zeit,1289) 계획된 것이라고 했다.(동상 P.43) 그래서 스테크 자신이 확정한 결론은 이렇다: 구원사상은 기독교 복음의 특징이며, 시대의 사상을 바르게 되도록 기여할 수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소위 간현주의(Doketismus)로 근절시키기 어려운 경향은 구원사적 사고가 아니고는 물리칠 수 없기 때문이다. (동상 P.52) 스테크의 이러한 말들에서 구원사 개념의 양면성이 더욱 분명히 나타나게 되었다. 그의 견해에 따르면 역사주의가 구원사적 사고 방식을 통해 신학에 진입하 게 되었다는 것이다. (동상 P.53). 더우기 구원사 사상은 우리에 대한 하나님의 구원을 “과거”에만 집착해서 연유를 삼는 반면에 “현대”와 연관시키는 데 별 로 성공하지 못한다고 지적하였다.(동상P.54). 그리고 우리가 하나님의 계시를 찾고 기대하는 것은 성경 본문 속에 살아 있는 복음의 음성 (Viva vox Evangel ij)안에서이지 역사 안에서는 아니라는 것이다. 하나님의 처우하심이 성육과 부 활 안에 수렴되어 있고, 그리고 이 처우하심이 “말씀”의 증거를 통해 우리와 접 촉한다는 것이다. 그러니 “그것이 (하나님의 처우) 역사 한에 들어와서 믿음으 로 만드는 것이 아니고 말씀 안에서 우리에게 증거되고 인봉되는 것”(동상P.61) 이라고 한다. 그리하여 스테크는 말하기를 “구원사 사상은 역사적인 최고의 인식탐구로 인정 되어 기독교 진리를 역사 개념의 수단으로 이해하고 증거해야 한다. 그러나 사 실적으로 그렇게 증명되지 못하는 것은 사람들이 그것을 잘못 사용하기 때문이 라는 것이다” (동상 P.61) 이와 같이 그의 말은 오늘날 신학 토론에서 신랄히 예각되어 있는 문제 곧 구원,혹은 진리, 혹은 말씀, 혹은 본문, 혹은 케리그마라고 하는 주제와 역사라 주제가 구원사 개념에 수렴되어 있다는 말이다. 다시 말하면 구원사 사상이 하 나의 신학적 개념으로 정착하여 그같은 원리들을 천착하여져서 우리의 해석학 원리로 나타나기에 앞서 구원사 개념이 강조된다는 아리스토적인 스콜라주의, 상태적인 정통주의며, 또한 역사에 대해 무관심을 나타내는 실존주의적 “동시 성”(gelijktijdigheid)에 반대하여 연유된 배경이 있다. 한마디로 말하면 구원 과 역사와의 관계이다. 이 둘이 서로 모순되는 것인가 아니면 서로 조화될 수 있는가 하는 문제인 것이다. 이것은 곧 진리를 이해함에 역사는 어떤 위치에 있는가 하는 것이다. 역사에 정당한 위치를 부여하지 않고 정경을 떠나서 역사 자체 안에서만 그 진리의 의미를 찾으려고 하면 구원사 개념에는 벌써 역사주의 가 개입하게 된다는 것이다. 구원사에 있어서 바로 이러한 역사의 문제가 오늘날 해석학의 주된 관심사가 되고 있는 것이다. 현대 신학의 실마리들이 얽혀 있다해도 과언이 아닌 이 구 원사 개념의 문제는 우리 스스로가 구원사적 전통을 견지하고 있다. 하여 무비 판적으로 성경자체에만 들어가서 구원사적 체계를 발전시킨다 해서 간단히 해 결될 문제가 아니다. 그러니 우리 입장에 일치하는 구원사적 원리들을 제시하기 앞서 구원 혹은 진리와 역사가 이해 되어져 왔는지를 살피는 것이 중요하다. 한마디로 말하면 “구속사”란 말 자체가 개혁주의적이라고는 할 수 없고 그렇게 소개된 적도 없다. 이 말 자채는 쉽게 여러 종류의 경험신학이며, 이성주의며, 실존주의며, 이단들에 연결되어 그 나름대로 사상체계를 세운다. 그러니 우리는 이런 것들을 구별해 낼 사명이 있는 것이다. 이런 작업을 1934년도에는 Nass S- childer 교수가 행하였다. 그 당시 바르트 신학이 개혁 교회에 스며들어올 때, Schilder 는 “역사의 본질과 가치에 대한 전혀 다른 개념이 변중신학과 개혁주의자들 간에 신학의 오류를 미리 간파하고 교회에 알려준 데는 스킬더 교수의 공로가 크다. 그리고 바르트의 역사 개념이 구약 해석학에 영향을 주었는데 이 영향 아래 쓰여진 것이 W.Vischer의 Das Christuszeugnis des Alten Testament 과 M.Hellbardt의 논문 Die Auslehung des Alten Testaments alstheologische Disziplin(ln Theologische Blatter 16, 1937 pp129-143)였다. 이들에 대해서 화란 개혁 구약 교수였던 N.Holwerda는 “설교에 있어서 구원사” (“De Heilshistorie in de prediking” Gere for meerd Theologisch Tijdschrift ,Aattea, novended 1942)에서 이들의 구원사 개념을 “가현적 해결”이라고 진단 했던 것이다. 그 이후 칼 바르트의 신학의 여러 분야에 영항을 미치자 그의 ” 교회 교의학”(kirchliche Dogmatik 1932)에 나타나는 “구원사”를 철저히 분석하 고 그것을 불트만의 실존적 의미의 구원사 개념과 비교하면서, 또한 칼 바르트 의 구원사 개념의 구약학자 폰라드의 전승사 개념에 미친 것을 보고 이를 서로 비교 분석한 학의 논문이 C.Trimp교수의 Om de Oeconomie vanhet Welbehagen( Goes: Oosterbaan s Le Cointre, 1961)였다. 그는 결론짓기를 바르트와 불트만에게는 본질적으로 같은 컨센서스(de eigenl- ijke Consensen)가 있다고 하였다(동상 p.191). 이쯤되면서 개혁 신학자들에게 는 구속사의 진리 규명에 있어서 변증 신학과 실존주의 신학, 전승사적 구약 해 석을 비교하면서 그 역사 개념을 정체를 구분할 수 있는 눈이 생기게 된 것이다. 그런데 우리 한국특히 고려 신학교를 중심해서 말하면 바르트 위기 신학이 한국 교회에 소개되고 브룬너가 1949년 말에 한국 교회에 와서 강의하자 고신 학우회는 이 신정통주의 신학과는 상관이 없음을 밝히는 성명서를 내었고 그 이듬 해 1950년 3월에 진리 운동 제 일호로 박윤선 교장이 “정통신학에서 본 바르트 와 브룬너의 위기신학”을 내놓았던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바르트 신학의 구원 사 개념의 역사를 의식하고 쓴 것은 아니고 단지 교의학적 측면에서 바르트 교의 와 웨스터 민스터 신조를 대조한 정도였다. 그러나 근래에 바르트 연구에서 박윤선 박사는 역사를 의식하나 그보다는 철학적 전제에서 바르트를 보고 있다(신학정론 1985). 요즘에 와서 윤리학 교수 이보민 교수는 “기독교 윤리학의 제 문제”(서울:기독 교 문서 선교회,1985)에서 해석학과 철학문제를 다루면서 이 역사의 문제를 상 당히 깊이 있게 다룬다. 그러나 그는 현대 철학적 인식 구조 속의 역사 개념을 초월적 지평(transcendental cricitisism)에 의해 파악하려는 데 힘썼고 성경 분문 속의 역사 개념을 다루지 아니했다. 그러나 나는 “구속사적 성경해석”( 서울:기독교문서 선교회, 1986)에서 성경 분문 속의 구원사의 역사 개념을 파악 하려 했던 것이다. 바로 이러한 문제가 오늘날의 해석학의 경계선과 과업이 무 엇이 되야 함을 시사해 준다고 하겠다. 그러므로 잠간 해석학의 본질이 무엇인지 규명하는 것이 우리 구원사 개념에 도움을 줄 것이다. 원래 해석학 하면 영어로 “hermeneutics”인데 이는 (snr 24: 27) 에서 온 것으로 “설명한다”,”주석해 내다”는 뜻이다. 이것은 단어 사전상으 로 볼 때 같은 의미를 가진 exegesis와 같이 직접적으로 본문에 관계되는 말이다. 그런데 오늘날 사람들은 “주석학”보다 “해석학”이란 말을 더 잘 사용하며 해석학이란 말이 어떤 권위가 있는 듯이 과대 평가하는 경항이 있다. 해석학의 원래 의도는 “주석의 이론”이란 뜻으로 해석학은 본문 자체에서 끄집어내는 이 론이며 학문이다. 그러므로 이론 자체는 계속 본문에 의해 양육 받고 교정받아 서 그것에 대한 사실적 해석이 되어져야 함이 마땅한데, 오늘날의 해석학은 그 보다는 이론적 체계를 독자적으로 확립하려는 것이다. 즉 본문을 떠난 이론 수립인 것이다. 개혁주의 주석가 S.Greijdanus는 1946년 에 이미 Schriftheginselenter Schriftverklaring(Kampen)을 쓸 때 이런 것을 예견이나 한 듯이 이렇게 말하고 있다. “해석함에 있어서 주석 자체는 그 작업 방식을 고려해야 한다” 그리고는 해석학은 그 성격상 “성경이 그 말씀하신 대로 그 뜻에 따라 해석되고 설명되는 방식에 관해서 하나님이 성경 안에서 계시하시 는 것을 따라야 한다(동상 p.6,7)고 했다. 그런데 오늘날 해석학은 이 고전적 의미를 떠나서 전혀 다른 방도로 나가고 있는 것이다. 우리 개혁주의 해석학은 B.Warfield가 말했듯이 선험적(apriori)작접이 아니라 경험적(a posteriori)작업이다. 어떤 인간적 전제로 해석하는 것이 아니라 본문을 연구해 본 결과로 나 오는 작업이란 뜻이다. 우리 개혁 주의는 본문에서 나온 진리 혹은 케리그마하 면 그것은 역사와 연관된곳으로 보며 여기에 어떤 역사간에 대립점을 찾지 않는다. 그러나 오늘날 해석학은 이 진리(케리그마)와 역사가 상치되어 있는 것으로 보 면서 , 또한 긴밀히 연락되어 있는 듯이 생각한다. 그러면서도 이 양자가 서로 조화를 이룬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 혹은 가능하다하는 것이 오늘날의 해석학과 구원사 이해에 난점을 주는 점이다. 이런 면을 우리는 역사적으로 살펴보고자 한다. < 구속사적 성경해석학 > – D. L. Baker 著 (원서명 : Two Testaments One Bible) Ⅰ. “구약적” 해결들 (A. von Ruler) 1. “이스라엘의 역사와 대단히 밀접하게 연결된 계시가 어떻게 해서 기독교회의 계시가 될 수 있겠는가? … 만일 구약성경이 기독교인들을 위한 계시가 된다고 한다면 그리스도인들은 이스라엘이든지 아니면 이스라엘과 관계를 갖든지 해야 한다. 그러한 방법으로써만 이스라엘에 발생한 것이 그들에게도 적용된다. … 구약의 계시가 이처럼 이스라엘의 역사에 근거하고 있기 때문에 그 계시는 이스라엘의 ‘재현’이 있을 때에만 충분히 전승될 수 있을 것이다.” (p.99~100) 2. “신약은 무엇보다도 사죄에 집중되어 있는 반면, 구약은 왕직에 집중되어 있고, 신약의 두드러진 사건 – 선택받은 백성이 메시야를 배척함 – 은 구약에서 예견되지 않은 것이며, 고난과 하나님의 사랑은 신약의 기조인 반면, 하나님의 진노와 영광은 구약의 기조이다. … 신약에는 한 가지 사죄 방법이 있을 뿐이지만 구약에는 많이 있으며, 신약에는 사도들이 열국으로 파송되고 있는 반면, 구약에는 열국들이 구원을 얻기 위해 이스라엘로 와야 했다.” (p.104) ☞ 판 룰러는 구약에는 많은 구속의 방도가 있었으나 신약에는 오직 한 가지 방도밖에는 없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대조에는 어느 정도 진리가 담겨있으나, 대속(substitution) 사상이 오직 신약에만 명백히 나타난다는 그의 진일보한 주장은 용납할 수 없는 것이다. 이와는 반대로 대속은 구약의 중요한 개념이다. “대속과 속죄가 의미하는 바를 이스라엘은 매우 잘 알고 있었다. 그들에게 알지 못하는 것이 있었다면 그것은 대속과 속죄가 어떻게 나사렛 예수 안에서 최종적으로 완성되는가 하는 것이었다.” (stamm, Cullmann, p.115) 3. “교회가 그리스도만을 전파해야 하는가? 라는 문제에 대한 답은 부정적이다. 왜냐하면, 그 나라를 설교하는 것 – 사실 그 나라 때문에 그리스도가 오셨다 – 이 더 근본적이기 때문이다.” (p.110 上) 4. “판 룰러는 창조론이 구원보다 더 근본적인 것이며, 그러므로 성화가 화목보다 더 크다고 전제한다. … 구약은 창조에 관심이 있으며 신약은 구원에 관심이 있다고 간주한다. 그러므로 자연적으로 구약이 신약보다 우월하다는 결론에 도달하게 된다.” (p.118) ☞ 성경 전체의 가르침에 대한 균형 잡힌 기독교적인 입장은 창조와 구원 모두 중요한 것이며, 어느 하나도 다른 하나가 없이는 존재할 수 없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다. (Toombs, p.120 上) 5. “이스라엘은 신정왕국으로 시작하였으며 교회가 신정왕국이 되었고, 신정왕국은 세상의 최종적인 기대이다. 이러한 사실을 근거로 이스라엘이 교회보다 더 중요하며, 구약이 신약보다 더 중요하다는 결론이 나온다는 것이다.” ☞ 구약이 하나님 나라의 상을 그리고 있을지라도 그 나라의 도래를 묘사하는 것은 신약이다. 그러므로 구약은 구원보다는 하나님의 나라를 다루고 있다는 사실을 근거로 구약이 신약보다 우월하다고 하는 것은 오류이다. (Wolff, p.122) 구약적 관점에서 보면 예수 그리스도는 최종적인 행위이지만 신약적 관점에서 보면 그는 역사의 중심이 되었다(Cullmann). 그러므로 신약은 단순히 구약의 진정한 의미를 해석하는 부록이 아니라 그의 백성 이스라엘의 역사에 나타난 하나님의 활동을 동일하게 기록한 것이며, 그러므로 하나님의 자기 전달 또는 자기 계시가 된다. (p.124) 6. “구약은 기독론적으로 해석할 것이 아니라 종말론적으로, 판 룰러의 표현으로는 신정왕국적으로 해석해야만 한다.” (p.120, 下) ☞ 이스라엘이 겪은 국가의 형식들 – 광야 공동체, 부족 동맹, 왕정정치, 포로 후기 공동체 등 – 가운데 어느 하나도 신정왕국을 성공적으로 표출한 것은 없었고 예수께서 오셔서야 마침내 하나님의 나라가 시작된다. 그러므로 신정왕국이 이스라엘의 전제라는 판 룰러의 주장은 재검토되어야 마땅하다. (Briezen, p.121) * “구약적” 해결들에 대한 정리 ☞ 판 룰러는 “신약은 무엇보다도 사죄에 집중되어 있는 반면, 구약은 왕직에 집중되어 있고, 신약의 두드러진 사건 – 선택받은 백성이 메시야를 배척함 – 은 구약에서 예견되지 않은 것이며, 고난과 하나님의 사랑은 신약의 기조인 반면, 하나님의 진노와 영광은 구약의 기조이다. … 신약에는 한 가지 사죄 방법이 있을 뿐이지만 구약에는 많이 있으며, 신약에는 사도들이 열국으로 파송되고 있는 반면, 구약에는 열국들이 구원을 얻기 위해 이스라엘로 와야 했다”고 주장한다(p.104). 왕이신 하나님께서는 무엇 때문에 만물과 사람을 창조하셨고, 무엇 때문에 사람들을 구원하시는가? 그것은 서로 인과관계를 맺고 있는 것이지, 서로 배타적이거나 더 우월한 문제라고 보아서는 안 될 것 같다. 메시야의 고난과 죽음에 대한 예언이 구약에 나타나지 않았는가? 하나님의 사랑과 진노와 영광은 구약과 신약에서 동일하지 않은가? 이 둘을(창조와 구원, 구약과 신약) 구분을 지어 생각하지만, 너무 분리시켜서 보지 않는 것이 좋겠다. ☞ 판 룰러는 구약은 하나님의 본래적이요 본질적이요 정경적인(규범적인) 말씀이며, 신약은 구약의 해석학적 부록(p.107)이라고 보면서 구약에서부터 신약으로의 계시의 발전이 없다고 하였는데, 구약의 감추어져 있었던 많은 희미한 부분들은 오히려 그리스도의 가르침과 그의 제자들을 통해서 확연히 드러나게 되었음을 인지(認知) 해야 할 것이다. 구약이 바라던 그리스도를 신약의 복음서들이 자세히 알려 주고 있으며, 서신서들을 통해서도 우리에게 확대.해석하여 주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면에서 구약으로부터 신약에로의 계시의 발전이 있다고 보여진다. 그러므로 구약과 신약의 관계를 단절시켜서 생각하기만 할 것이 아니라, 구약이 말하는 내용들이 자연적으로 신약으로 이어지는 신.구약성경의 통일성을 인정해야 할 것이다. ☞ 우리는 하나님의 창조와 구원이라는 둘 중의 하나를 가지고 어느 것이 더 우월한가를, 어느 것이 더 하나님께 있어서 더 소중하고, 또는 그렇지 않은가를 생각하기 보다는 하나님의 이루시는 모든 일(창조와 구원 모두를)을 동일하게 중시해야 한다. ☞ 구약의 이스라엘과 신약의 교회 모두는 하나님의 통치와 다스림을 받고 있다. 그것들은 외형상 완전하지도 않고 거룩하지도 않지만, 그럼에도 하나님의 다스림과 하나님의 통치에 의해 거룩하게 되어진다. 순서상으로 볼 때 이스라엘이 교회보다 먼저이며 구약이 신약보다 먼저인 것은 사실이지만, 교회와 신약 역시 간과되어 질 수 없으며, 창조와 구원은 동일하게 하나님의 계획에 있는 것이기 때문에 모두 중요하다. Ⅱ. “신약적” 해결들 (Rudolf Bultmann) 1. 불트만(Bultmann)은 구약이 기독교 역사의 일부(“그것은 지금까지 그래왔듯이 여전히 유대인들을 위한 책이다”)라고 주장하면서 구약을 거부한다. 그에게 있어서 구약은 기독교인의 경전은 아니지만 신약과 기독교의 전제인 것이다. 그에게는 이스라엘과 교회가 전혀 다른 별개의 실체이기 때문에 구약의 역사가 기독교의 역사가 될 수 없는 것이다. 불트만의 구약에 대한 이해는 신약과는 다른 율법에 불과한 것으로써 신약의 은혜와는 다르며, 기독교인들의 생활 규범에 관한 책이고, 그렇기 때문에 그것은 문자적으로만 사용되어야 하는 것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 구약의 내용들은 단지 신약과 기독교의 전제에 지나지 않는 것은 아니며, 하나님의 사역은 희미했던 구약 시대의 사건들을 통해서 더 확실하게 드러난 신약의 사건으로 나아갔던 것 뿐이다. 구약의 구원도 하나님을 믿는 믿음으로써 이루어진 것 같이 하나님의 사역은 구약과 신약에서 실제적으로 이루어 진 것이다. 또한 하나님은 여전히 구약의 율법을 통해 신약의 시대를 살아가는 그의 백성들에게 어떠한 방식으로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가를 알려주고 계신다. 구약은 보다 확실하게 드러난 신약 안에서 해석되어 질 수 있다. 2. 불트만은 예언과 성취에 대한 오늘날의 견해가 불가능한 것이라고 하면서 예언은 구약 역사의 실패에서 발흥된 약속으로 이해해야 한다(p.155)고 하는데, 구약의 역사는 그 내적인 자가당착, 곧 실패(Scheitern) 가운데서 성취된다는 것이다. 이것은 하나님의 은혜가 역사의 실패로 인해서 언약, 하나님의 나라, 하나님의 백성을 인식 불가능하게 됨으로써 자신들의 상황의 전적인 불가능을 인정하는 사람들에게만 주어지므로 그 실패는 곧 약속이 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성취는 실패인 역사 발전의 결과가 아니라 종말론적 새 창조인 하나님의 은혜와의 조우의 결과라는 것이다(p.153). 그에게 구약의 역사에는 하나님의 백성에 대한 이상과 경험적인 공동체의 실체 사이의 내적 모순이 있으며, 구약성경은 약속이 되어버린 역사의 실패를 기록한 신약의 전제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 성경에는 우리가 보기에 대조적인 것들과 서로 모순되어 보이는 내용들이 있다. 그러나 이러한 것들은 서로 완전히 다른, 상충되는 것들로 보기 보다는 신.구약 성경의 통일성 안에서 나타난 다양성으로 이해되어야 할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그의 인격 안에서 구약과 신약이라는 두 성경을 하나로 만들었으므로 우리는 그에게 집중해야 한다. Ⅲ. “성경적” 해결모색 1. G. Von Rad는 신약이 그 메시지를 표현하기 위해 구약을 필요로 하기 때문임을 증거할 목적으로 구약이 사용된 것은 아니라고 하면서 신약의 구약 사용으로 시작하지 않고, 구약이 어떻게 신약을 지향하는지를 보여주려고 한다. 그에게 있어 신약의 접근은 신.구약의 관계에 대한 일반적인 이해를 전제하면서 그 기초 위에 인용 또는 예증으로써 구약을 현실화(actualizing)하는 것이다. 신약과 구약에는 대조와 계속 모두 존재하는 것이다. Von Rad는 그리스도에 대한 우리의 지식은 구약의 증거 없이는 불완전하며, 구약을 그리스도에 대한 증거로 이해한다. (p.249, 257) ☞ 확실히 신.구약 성경은 어느 한쪽에 우월성을 둘 문제가 아니며, 신.구약 성경이 함께 어우러져서 확증하고 예증되어야 한다. C. H. Dodd는 구약이 과정이며 완결된 총체가 아님을 지적하고, 신약이 최종적인 것이라고 주장하는데, 교회는 구약을 영속시키며 신약을 시작케 하고, 구약의 주제가 공동체 이스라엘인 반면에 신약의 주제는 한 인물 예수 그리스도라는 점에서 두 성경 사이에 상이점이 있다고 지적한다. 그러나 구약과 신약 간의 연속성과 불연속성은 성경 내에 있는 본질적인 통일성과 부합하는 것임을 밝힌다. 구약은 신약과 함께, 오로지 함께만 기독교의 성경을 이룬다. 구약에는 난제들과 부조화가 포함되어 있으며, 그것은 성취의 빛 하에서만 정당하게 이해될 수 있다. 반면, 신약은 그 배경을 구약에 두며, 그 배경과 분리된다면 곡해된 형식으로 해석될 가능성이 있다(p.313). 구약에서의 하나님과 신약에서의 하나님은 여전히 세상과 역사, 모든 생활 가운데서 존재하시고 활동하시는 분이시다. 하나님은 여전히 창조하시고, 구속하시며, 섭리하시는 하나님으로서 존재하시는 것이다. 신.구약 성경에 어떤 면으로는 대조적으로 보이는 모습이, 어떤 면에서는 계속되는 모습이 함께 나타나고 있는 것이지, 그것들이 따로 분리되어서 서로 다른 것을 말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2. Von Rad는 의미를 지닌 역사(Geschichte)와 시.공간의 한 지점에 발생한 역사(Historie)를 구분하면서 성경을 일반적인 진리의 제시 또는 역사 탐구의 자료가 아니라 역사 가운데 나타난 하나님의 구원 활동에 대한 증거로 이해한다(p.258). 그런데, 암슬러의 신.구약의 관계 문제에 대한 해결은 다소간 Von Rad의 그것과 유사한데, 구원사로 전 구약을 해석하려는 그의 관심은 마치 Von Rad처럼 그도 이러한 관점에 적합하지 않는 모든 것을 부정적으로 평가하는 것과 같은 것이 되어버렸다(p.289). ☞ 신.구약 성경에 대한 관심을 ‘구속사’에 두는 것은 옳은 관점에 속할 것이다. 왜냐하면 신.구약 성경이 하나의 구속사를 형성하고 있기 때문이다(Von Rad는 ‘구속사’라는 개념은 끊임없이 뚫고 들어오는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 하나님의 정하신 목표 지점을 향해 움직여 나가는 일련의 역사 과정으로 묘사된다고 한다 -「구약해석학」p.28). 그러나 구속사만을 오직 신.구약 성경의 모든 것이라고 말할 수는 없으며, 구속사 또한 신.구약 성경 전체적인 맥락 속에서 생각되어야 할 것이다. 그 안에서 우리는 여러 가지를 말할 수 있고, 가장 큰 물줄기(하나님 나라, 왕국)를 발견할 수 있다. 3. 신.구약 성경의 관계에서 구약을 해석하는 방법으로 유형론을 많이 사용하고 있는데, 그것은 역사적이고 실제적인 상응을 암시하는 것으로써 세부적인 대구(對句)에 관심을 두지 않고 근본적인 원리와 구조의 일치에 관심을 두는 것이다. Amsler와 Gundry는 유형론의 기초가 하나님의 역사 운행이라고 본다(p.237). 이것은 유형론의 기능이 구약 사용의 절차를 제시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백성들의 경험 가운데 나타난 하나님의 일관성 있는 활동을 지적하는 것이다. 그러나 구약의 모든 부분들이 유형론적으로 해석되어지는 것은 아니다. Th. C. 프리젠은 해석에서와 마찬가지로 설교에서는 구약과 신약을 동일시해서도 분리해서도 안 되며, 다른 것을 희생시키며 어느 하나를 지나치게 강조해서도 안 된다고 주장하면서 두 성경 모두 창조부터 절정까지 하나님의 인간과의 교통에 대한 증거의 부분으로 인식해야 함을 말한다(p.304). ☞ 하나님의 사역하시는 방법이 외형상으로 볼 때는 신.구약에 있어서 차이가 있는 듯 하지만 여전히 동일한 목적을 향해 그 모든 것이 움직이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구약의 방법과 신약에서의 방법을 가지고 완전히 다른 두 개의 것을 말한다기보다는 서로 보완하며 충족시키는 면에서 바라 볼 필요가 있겠다. 구약의 내용들이 보잘 것 없거나 불필요 했던 것이 아니며, 신약만이 우수하고 뛰어난 것은 아니다. 구약에서의 방법이 실패한 것도 아니고, 신약만을 홀로 필요로 해야 하는 것은 아니다. 하나님의 열심이 드러나 있는 구약과 신약이 모두 필요하다. 구속사적 성경 해석.hwp 출처 : 개혁하는 교회(기독신학연구실) 글쓴이 : 청지기 원글보기 : 청지기 메모 : 감사합니다..


요점 성경 공부 – 박광석 : 두란노

“부분적으로만 알던 성경이 어느 순간 전체적으로 한눈에 들어왔다”『요점 성경 공부』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경청하는 청중의 자리에서 성경을 직접 읽고 공부하는 성숙한 신앙인의 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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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점 성경 공부 - 박광석 : 두란노
요점 성경 공부 – 박광석 : 두란노

나는 성경을 떠나서는 신앙이나 설교는 물론, 삶 자체도 아무것도 안 된다고 믿는 사람이다. 그리고 성경 안에는 모든 것이 있다고 믿으며 살아왔다. 하나님이 성경이라는 텍스트를 우리에게 주신 이유는 성경을 통해 신앙과 삶을 온전히 이루어 가길 원하시기 때문이라고 확신한다. 문제는 우리가 그 보물 지도를 잘 볼 줄 모른다는 것이다. 성경을 읽었는데 이해가 되지 않는다면 이 책을 권하고 싶다. 눈이 열릴 것이다. 내가 이 책을 쓴 이유는 당신을 하나님의 세계로 이끌고 싶은 간절한 바람 때문이다. 이 책의 부족한 부분을 좀 더 채우고 보완하기 위해 후속편을 쓰도록 기도하며 노력할 것이다. 지금도 나는 매일 성경을 읽으며 하나님의 뜻을 더 알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오늘 나의 목회의 절대적인 중심과 힘은 오직 성경 말씀이다. 당신에게도 이런 은혜가 있기를 바란다.

하나님은 성경보다 놀라운 계시를 주신 적이 없다. 때문에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임을 믿는다면 반드시 읽어야 한다. 성경은 장식용이 아니다. 선반에서 내려와야 하고, 우리 눈으로 읽어야 한다. 마음을 열고 읽어야 한다. 성경의 주변적인 지식을 아무리 많이 알고 성경에 관해 부분적인 이해를 한다 할지라도 성경을 읽지 않는다면 그 사람은 성경의 지식을 가지고 있다고 말할 수 없다. 성경의 어느 한 부분 또는 자신이 좋아하는 구절만이 아니라 성경 전체, 그리고 성경 각 권을 보면서 그 안에서 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을 이해하려 하다면 더욱 풍부하고 깊은 은혜를 받게 될 것이다.


비디오 구속사적 관점 영어 성경 전체 맥 잡기 (땅이라는 관점을 중심으로 구속사적으로 성경 이해하기), 구속사, 성경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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